복이 많은 탓인지 지지리 복이 없는 탓인지, 어쨌든 난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산다. 꼼지와 호빵과 번개. 머리에 피가 막 마르던 시절(?)부터 봐온 꼼지는 이제 중년이란 이름을 붙이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점에 접어 들었고, 이제 십대 소년들이 된 두 아들 호빵과 번개는 저것들이 어릴 때가 있었나 싶게 4차원 세계로 빨려가듯 후다닥 청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가 남자가 주인공인 두권의 소설책이 남얘기 같지만은 않았다.
책들을 겹쳐 읽다 보니 우연히 중년을 넘어선 두 남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고 거의 같은 시기에 끝내게 되었다. 한국태생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의 <Aloft> 와 중국의 젊은 작가 (조만간 '젊은'이란 말을 떨어져나갈 듯)로 불리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다.




이창래 소설의 주인공은 미국남자 제롬 배틀 (Jerome Battle) 이고 위화 소설의 주인공은 허삼관이다. 한 때는 소년이었을 이 두 남자는 미국의 현대와 중국의 근대라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선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둘 모두 청춘을 거쳐 부인을 맞아 그들만의 둥지를 틀었고, 그저 하늘이 주는 대로 자식 낳고 살다 이게 내 삶인지 가족이란 이름의 딸린 식구들의 삶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도 이른다. 달린 아이들은 먹을 것이든 사랑에든 조금만 방심해도 주려 치명타를 입기 쉽상이고 동반자라고 이름하는 부인은 가족 생계와 본인의 외로움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남편보다는 돈을, 남편이 처한 입장 보다는 자신의 갈망을 바라본다.
제롬 (일명 제리 Jerry) 은 복지관에 맡겨진 아버지와 더불어 이제는 독립한 딸과 아들을 두었다. 제롬의 아버지는 전화 저쪽에서 경로원에서 꺼내달라거나 가족 모임에서 똥을 퍼질러 싸서 그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끝내는 경로원을 몰래 도망치며 그의 일상을 괴롭힌다. 부모만 그런가. 제롬의 할아버지대부터 내려온 가업인 조경사업을 자기에게서 물려받은 아들은 회사가 기울어 가는 것을 숨기고, 잘난척 만땅으로 똑똑한 교수지망생 딸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인기없는 소설을 쓰는 남자와 결혼해 임신과 더불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가져다 준다.
허삼관은 피를 판 돈으로 꼬셔 얻은 부인 아래 부인이 결혼 직전 내통한 남자의 아들인 일락과 자신의 피를 받은 이락, 삼락의 세 아들을 두었다. 자신이 가장 예뻐하며 11년을 키운 아들이 남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는 부인을 욕하고 그 아이들을 차별하며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기도 하지만, 문화혁명 과정에서 간통녀로 비판 받는 아내에게 몰래 밥과 반찬을 날라주는 역사의 물결 속에서 살기 위해 헤엄쳐 가는 보통 남자다. 키운 정과 나은 정 모두를 위해 목숨같은 피를 팔고 와서도 자식의 상관을 접대하며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는 특별히 똑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아니 되려 사람들에게 '자기 자식도 아닌 아들을 키우는 덜떨어진 놈'으로 손가락질 받는 멍청하고 답답해 보이는보통 아버지다.
제롬은 사업에선 이미 은퇴하고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에 끼어 죽은 아내의 빈자리 대신 오랫동안 애인으로 지내온 여자 하나 어쩌지 못하고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허삼관은 할아버지에 이어 자신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던 삼춘까지 잃고 그저 한 사람의 남편이자 세 아이들의 아버지로 삶을 헤쳐 나간다. 피같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피를 팔아 돈을 만드는 가운데 친구를 만나고 친구를 잃는다. 피팔다 죽어가는 친구를 보고도 간경화에 걸린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피를 팔러 길을 나선다.
제롬도 허삼관도,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서라도 절대 인용될 것 같지 않은 역사라는 강물 아래에 잠겨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남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특별히 마초도 아니요 특별한 군자도 아니다. 태어 났으니 살아 가고, 살아 가고 있으니 지친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요새말로 시대의 찌질들일지도 모른다.

내 곁에만도 세 명의 남자가 있으니, 이 세 남자들도 시대의 찌질이로서 각자 부여받은 한 시대를 살아 가겠지. 세 남자에게 약간 연민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불쌍하다고 생각진 말자. 찌질이가 한 둘인가. 남의 집 남자들도 자세히 뜯어 보면 모두 별 다를 것 없는 찌질들일게 분명하다(고 우기지 뭐). 비록 찌질하게 살아 가더라도, 혼자 비행기를 타며 환상에 젖든 피를 팔아 황주를 마시든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며 삶을 여정을 이어 가주기만 한다면 곁에서 보는 재미와 뿌듯함이 이 두 소설을 너끈히 넘어서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