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얻은 시간

 | 하루
2010/12/16 10:11
윌리암과 오늘 아침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취소 됐다. 아이폰이 망가진 탓에 노트북을 대신 끼고 다니고 잠잘때도 끼고 자는데, 아침에 눈뜨자 마자 컴뚜껑을 열었더니 윌리암에게 이메일이 와 있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돌아가신 분이 있어 그 장례식 때문에 오늘 교회 부엌에서 일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 연습에 못나오겠다고. 지난번 눈 때문에 취소되었던 연습 대신 오늘 오전에 하겠다고 했는데 유일하게 올 수 있다고 했던 윌리엄이 못나온다고 하니 나도 쉬게 됐다. 윌리엄은 은퇴한 흑인 아저씨다. 연습을 위해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으면, 늘 "난 은퇴해서 할일이 없는 사람이어요~" 란 일관된 대답을 해서 나를 웃긴다. 내가 시간이 되어 같이 연습 할 수 있다고 하면, 그때마다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연습에 나와 베이스를 연주한다.

이 은퇴한 아저씨는 구십 하고도 여섯살인가 먹은 노모를 보살피고 있다. 함께 사는 건 아니다. 이 노령의 엄마가 아직도 운전도 하신단다....! 가끔 "오늘 엄마가 전화해서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하며 연습에 조금 늦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 장례가 있을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는 백살 가까운 노모를 위로 하기 위해 이 육십줄의 아저씨는 아침을 함께 먹으러 이른 아침 노모의 집으로 간다. 한편, 오늘처럼, 이렇듯 교회 장례식이 있는 날은 사람들을 도와 부엌 일을 돕기도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그의 짧은 약속 취소 편지를 읽으면서,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지구상에서 나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윌리엄이라는 흑인 아저씨의 삶이 문득 살갑게 느껴졌다. 윌리엄은 Thanksgiving holiday 때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 오면서 우리 단원 모두에게 기념품 하나씩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내 두 아들들의 겨울 모자도 하나씩 사다 주었더랬다. 따뜻하고 정많은 흑인 아저씨. 이런 그를 우리집 호빵과 번개도 첫 만남부터 그를 좋아 하였다.

오후에 있던 번개 바이올린 렛슨도 내일로 옮겨진터라 보통은 움직여야 했을 오늘 아침이 한가롭다. 홍이가 부탁한 뉴욕 공연 인터뷰 영상 번역일을 해야 하긴 하지만, 어제 내차 세 개의 비디오를 대충 끝내 놓았으니 오늘도 오후쯤에 세 개 정도만 더 해놓으면 되리라 생각하며 잠시 밀어 둔채로, 이 덤으로 얻은 시간을 조금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중이다. 책과 관련해서 종종 찾는 블로그들도 둘러 보며 나와 아이들을 위한 책 정보도 적어 두면서 말이다.

이젠 꼼지가 돌아 올 날도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더 느긋하게 있다가 텅텅빈 냉장고 메꾸러 장에 다녀올 생각이다. 친구가 많지는 않아도 마음 맞춰 음악을 할 수 있는 윌리엄 같은 사람도, 먼 여행에서 돌아 오길 손꼽아 기다려지는 꼼지같이 오래된 친구도, 블로그를 통해서 나마 영화와 책 이야기를 힐끔거릴 수 있는 낮모르는 친구들 (이렇게 불러도 되는가 모르겠지만) 도, 아직 나에게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애틋한 마음이 되어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건, 사람에게든 동물에게든 살아가는 힘이 될게다. 하루 하루를 다르게 느끼며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래 보면서...


2010/12/16 10:11 2010/12/16 10:11
Posted by 꼼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blog.comjirock.com/commi/trackback/306

댓글을 달아주세요

<< PREV : [1] :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 [378] : NEXT >>

BLOG main image
by 꼼미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일상
영화 드라마
논제
책읽기
음악
공연
취미
하루
자료
정치 사회
번역
먹는 일
여행, 구경
영화
번역
음악교육
고양이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2012/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58213
Today : 21 Yesterday :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