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의 스승은 엄마가 사주셨던 50권의 세계명작 전집과 세계 위인 전집, 그리고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신나게 뛰어 놀았던 친구들이었다고 해야겠다. 아버지는 회사일로 바쁘셨고 어머니는 다정했지만 종종 우울하셨으며, 언니는 이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는 나이였고, 오빠는 내가 싫어도 돌보아줘야 하는 상대였다. 중학교 시절 나의 스승은 단연 마당문고가 아니었을까.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만 했던, 그래도 충격적이었던 니체와 가브리엘 마르께스는 가끔은 포기하고 가끔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동문서답을 해대 '내가 이것들을 계속 믿고 따라야 하나'하는 회의를 주는 세속과는 거리가 먼 도인들 같기만 했다. 그리고 친구들. 내게 그런 책을 읽게 했던. 더불어 언니의 일기와 언니가 보러다니던 연극들, 그리고 시집들. 그것들이 지속된 건 질리도록 외롭다고 느꼈던 예고시절이다. 그때의 스승은 단연 헤르만 헤세라고 해야겠다. 그 단조롭고 무의미하고 외로웠던 시절,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만 붙어있으면 뭐라도 읽어 댔다. 중학교 시절 언니가 "이런 건 좀 한번 읽어라..."며 던져 주어 손에 잡았던 이후, 족히 세 네번은 줄까지 벅벅 그어가며 읽었지 싶은 데미안과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헤세 에세이, 수레바퀴 밑에서 등등등. 그리고 시집들. 내가 특히 빠졌던 시인들은 김정환, 황지우, 양성우, 김남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 모두 언니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것들이었다. 대학때 스승이라면, 아무래도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와 철학 서적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용과 노동은, 그리고 민족음악연구회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마주했던 음악과 세상.
내 인생의 스승이라는 게 결국은 내 곁에 머물러 지식을 가르치고 교정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보이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나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끝없이 묻게 하고 끝없이 답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주는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나의 스승이 아니었나.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의 스승은 내가 목적없이 주기적으로 들리곤 하는 몇 개의 블로그들이다. 그것도 모두 우연한 경로로 찾아들게 된. 오늘은 그 블로그들이, 도덕과 윤리학의 차이를, 쾌활함과 쾌감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모순적이게도 슬픔이나 아픔, 통증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과 가능성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사람들은 소리없이도 계속 계속 싸워가고 있다는 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는 보이지 않는 스승들이다.
오늘 오전은 이렇게 스승들과의 대화(?)로 보냈으니, 이제서야 씻고 하루라는 밥그릇 채우러 일어나야 한다.
내 인생의 스승이라는 게 결국은 내 곁에 머물러 지식을 가르치고 교정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보이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나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끝없이 묻게 하고 끝없이 답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주는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나의 스승이 아니었나.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의 스승은 내가 목적없이 주기적으로 들리곤 하는 몇 개의 블로그들이다. 그것도 모두 우연한 경로로 찾아들게 된. 오늘은 그 블로그들이, 도덕과 윤리학의 차이를, 쾌활함과 쾌감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모순적이게도 슬픔이나 아픔, 통증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과 가능성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사람들은 소리없이도 계속 계속 싸워가고 있다는 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는 보이지 않는 스승들이다.
오늘 오전은 이렇게 스승들과의 대화(?)로 보냈으니, 이제서야 씻고 하루라는 밥그릇 채우러 일어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