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음악주간지''를 바라는 이유:
<씨네 21>을 읽으며 음악을 생각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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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씨네21>과 ‘예술 민주화를 위한 싸움’
2. ‘종합영상주간지’와 ‘종합음악주간지’ - ‘싸움’의 전술
2-1. 영화라는 이름의 광장
2-2. 새 작품과 감독에 대한 열정적 관심
2-3. 한국영화, 한국음악
2-4. 덧붙임 - 주간지의 장점과 <씨네21>의 글쓰기
3. ‘종합음악주간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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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였다. 7, 8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영화관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를 보았다. 미국 영화가 많았고 그 중에서도 뮤지컬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았다. 예를 들면 <7인의 신부>부터 <사랑은 비를 타고>, <쉘부르의 우산>, <올리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까지 뮤지컬 영화는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미국 캬바레 풍 탭댄스 영화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 바브라 스트라이젠드, 올리비아 뉴튼존 등의 가수들이 나오는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존 웨인의 서부영화, 제임스 딘, 폴 뉴먼, 오드리 헵번의 영화들, <애수> 풍의 전쟁과 사랑을 다룬 고전 영화 같은 것들도 보았다. 당시의 영화보기는 선택권이 없었던 만큼 종류도 다양했고 그 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영화보다 당장에 기억해내기 어려운 영화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영화 속의 음악도 함께 만났다. 내 음악적 취향이 클래식에만 집중되지 않는 이유에는 영화의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영화를 즐겨본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영화보기라면 설거지를 하다가도 고무장갑 빼놓고 따라나선다는 시인 김용택의 아내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95년 <씨네21>이 발간된 후로 영화를 즐기는 만큼 ‘종합영상주간지’인 이 잡지를 즐겨 읽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가 보고 싶으나 여건 상 그러지 못할 땐 <씨네21>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기도 했다. 어느 시기엔 본 영화보다 <씨네21>로 읽은 영화의 수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전체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3. ‘종합음악주간지’의 의미
<씨네21>을 들여다보고 ‘종합영상주간지’며 ‘종합음악주간지’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무조건 <씨네21>을 배워야 한다거나 지금 당장 ‘종합음악주간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씨네21>에서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따를 점이 있어 따른다고 한다면 좋을 일이다. 또, 솔직히 말해 ‘종합음악주간지’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달라거나 같이 하자고 하면 신이 나 방방 뜰 일이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의, 학술지도 아닌 대중 잡지에서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이다. 음악은 애당초 ‘음악’이지 ‘어떤 음악’으로 구분 된 것이 아니었으니 다시, 그리고 새로, 종합적으로 보려는 시각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또한 개인의 음악이 아닌 여럿의 음악을 추구하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추구의 방향은 물론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받은 문화로서 ‘예술의 퇴행’이 아니라 ‘예술의 발전’이어야 한다.
<씨네21>을 통해서 나의 영화세계가 넓혀졌듯이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와 수준은 발전한다. 모르는 사이 우리는 서양음악의 감수성을 학습 받았고 이제는 그 학습을 통해 음악을 듣는 귀가 확연히 달라져 버렸다. 지난 세기 모든 노래를 민요형태로 부르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처럼 나의 세대는 민요마저도 가요처럼 부르며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젊은 세대는 즉흥 랩에 친숙해졌고 어린 시절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듣고 자란 세대는 뽕짝마저도 리듬 앤 블루스로 현란한 장식을 넣어 부른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의 음악이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의 변형된 형태들로 뒤덮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빠져보기도 한다. 민요나 가곡이나 랩이나 리듬 앤 블루스나 모두 듣도 보도 못했다면 체득해 부를 수 없다. 나는 민요풍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랩도 못한다. 리듬 앤 블루스 또한 해본 적이 없으니 못할 것이 틀림없다. 민요도 랩도 리듬 앤 블루스도 꽤 들은 편에 속하지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배운 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그야말로 자기 것이 되었다는 말이겠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풍은 서양가곡풍이나 포크풍이다.
음악을 듣는 귀도, 들은 후 체득하여 부를 수 있게 되는 것도, 더 나아가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알게 모르게 한 학습, 그것이 우리의 모든 음악 감수성, 나아가서는 민족적 감수성을 지배한다. 민요풍이든 가곡풍이든 랩 풍이든 리듬 앤 블루스풍이든 이미 몸에 배인 음악은 마음대로 씻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노래들을 오히려 인정하고 들여다보고 들어서 재어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열심히 듣고
평가할 일이지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일이 아니다. 또 내가 먼저 안 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면서 우리의 음악 경험을 새롭게, 넓게, 깊게 만들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배우던 것을 의식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한다면 이때의 배움은 우리에게 발전적인 학습이 될 수 있다. 의식적인 배움과 앎을 통해 다양한 음악을 평가하고 비평할 수 있게 된다면 대량생산물과 같은 곡이 아닌 장인 정신이 깃든 수공예품 같은 곡들로 우리의 일상을 채울 수
있게 될런 지도 모른다. 필요 때문에 쓰더라도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묻은 물건으로 그 필요를 충당하듯이, 의도적인 앎을 통해 음악예술을 향유하는 우리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우리의 음악문화도 장르에 관계없이 만든 이의 정성과 정신과 마음과 생각이 빚은 음악이 더 많아 질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이다. 하우저와 이강숙과 이건용의 말은 이러한 뜻에서 오늘도 나에게 울림을 준다. ‘종합음악주간지’를 말한 것은 이처럼 다양한 음악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다양한 음악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다양한 음악 종사자들이 하나의 장에서 만나고 공부하여 더 나은 음악세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이강숙, <열린음악의 세계>, 서울: 현음사, 1980.이건용, <민족음악의 지평>, 서울: 한길사, 1986.
이건용, <한국음악의 논리와 윤리>,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7.
노동은, 이건용 공저, <민족음악론>, 서울: 한길사, 1991.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 외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2, 3, 4권, 개정판,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9.
민족음악연구회 편, <민족음악의 이해>,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5집, 1996.
민족음악연구회 편, <민족음악의 이해>,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6집, 1997.
김현수_종합음악주간지를 바라는 이유.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