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국의 정서
영화 <디워>와 <천년학>
영화 <디워>와 <천년학>
<디워>를 보고 <천년학>을 떠올리다니. 이것 또한 꽤 엽기적이단 소리를 들을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관세음보살님을 연상시키는 미국여자와 마침내 여의주를 차치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디워>의 마무리. 과장을 보태자면 수십분이라도 되는 듯이 느껴지는 용의 눈에 고인 그렁 그렁한 눈물의 클로즈업. 아, 그것도 모자라, 기절하게도 엔딩 클레딧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아리랑이라니.
그저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의 숭배자가 만든 B급 영화로 넉넉히 보려던 나를 끝끝내 참지 못하게 불을 지른 것은 예상보다 더 많은 미국 극장에 아리랑을 울려 퍼지게 해서 무엇보다 기쁘다는 감독의 말과 그걸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인거다. 아니, 도대체 왜 아무도 한국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영화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무사히(?) 개봉을 마친 이 순간에 한국적 정서에 대해 운운하는가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디워>는 간혹 있었던 미국 영화에서 나타난 이국에 대한 기분나쁘고 왜곡된 묘사보다도 더 나쁜 한국적 정서를 발산하는 영화다. 왜냐고? 감독이 이 영화를 마치 소신있는 ‘한국영화’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한 무섭고 진지한 용(또는 이무기)들의 싸움과는 관계없이 이 영화의 결과는 코메디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그럴듯 하지 않은 상상력이나 어수룩하다 못해 보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껄쩍지근 하게 만드는 연기나 대사를 능가하는 <디워>의 치명적인 약점은 덜 웃긴다는 데 있다. 보는 사람들은 커다란 뱀들이 도시를 부수고 싸우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가 심각함을 조장한다는 사실에 대해 코메디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건 마치 미국의 코메디 프로인 에서 나오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한국 조폭을 둘러싼 이야기를 보며 꺽꺽 웃게 되는 이치와 같다.
이 영화는 그저 즐기라고 만들어진 영화고 괴물을 주연급으로 하는 B급 영화다. 아나콘다 시리즈처럼 말이다. 이런점을 감독이 분명히 인지하고 심각함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웃게 되는 코메디적 재능을 오히려 십분 이용했다면 이 영화는 더 큰 흥행의 물결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심각한 한국의 전설에 대한 장황한 노인의 설명에 이어지는 아이의 “What are you talking about? (지금 도대체 무슨말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에 웃는다(관객들도 지금 도대체 이 영화가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거든...). 뿐만 아니라 내가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를 느꼈듯이 개봉관의 미국인들도 마지막 장면의 미국 여인의 승천(?)과 용의 눈물, 아, 이 신파를 넘어선 신파에 웃음을 터뜨리는 거다. 영화는 심각한데 보는 사람은 웃는다. 이게 코메디가 아니고 뭔가. 작품에 대한 관객간의 이런 반응이 의도 되는 건 아주 수준 높은 블랙 코메디에서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영화를 본 어떤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묻는다고 하자. 이 영화에서 보여준게 얼마나 사실적이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다 뻥이야…. 부잣집 딸만 머리 풀고 있는 것도 뻥이고, 나쁜놈들로 나오는 용이나 군사 같은 애들 같은 건 한국 전통 그림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고, 이무기 이야기는 있어도 착한 이무기가 여자를 잡아 먹고 승천한다는 건 완전 뻥이고…” “그럼, 아리랑도 뻥이야?” “아니, 그건 진짜 꽤 오랫동안 불려온 한국적인 노래야.” 이런 말이 오간다고 하면? 부르르 떨리는 지점은 미국 전역에 <디워>와 함께 울려 퍼졌다는 그 아리랑이다. 아리랑에 대한 흐릿한 연상은 있어도 뚜렷한 관심도 기억도 없던 사람들 뇌리에 이젠 아리랑은 <디워>의 뻥들과 미국여자와 용의 승천을 한국이란 나라와 함께 떠올리는 매개체가 될테니 그 결과가 참으로 기가 막혀 오는 거다.
열심히 재미 있는 영화 만들고, 돈 벌고, 번 돈 또 더 재미 있는 영화 만드는 데 쓰고 하는 심형래 감독은 백번 환영이다. 문제는 감독의 과도한 영웅심리인거다. 그 영웅심리가 사람을 괴물로 몰아가며 괴물로 변한 사람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왜곡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미 만든 영화 어쩌겠냐 싶지만, 앞으론 제발 그저 참신한 B급 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그럼, 왜 <천년학>을 떠올렸냐고?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라고 많은 사람들이 띄워 주었던 것을 기억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 임권택의 말 그대로 99번째 다음 그리고 101번째에 앞선 그저 100번째 영화라는 게 영화를 보고 난 나의 생각이었다. 영화의 아름다운 품새와 그 품새를 엮어 내는 구절 구절 이야기의 연결은 거장답게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럼에도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기에 거슬리게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해 감독이 스스로 ‘이건 대단한 작품이야’라고 선전하고 으스대는 <디워>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이긴 하지만, <천년학> 역시 영화 자체를 통해 '나는 지금 대단한 걸 너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다'고 관객을 지도하려 함으로써 아이러니 하게도 두 영화 모두 관객을 무의식적이며 깊이 있는 감동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감독의 영웅적 환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임권택은 자신의 <천년학>이 판소리를 통해 또 다른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난 그것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간곡한 사랑이야기에 대한 공감을 무르익히지 못하고 서술로 대치한 비중이 너무 많다. <서편제>를 통해 감싸오던 소박한 감동의 폭이 훨씬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빚어진 <천년학>에선 훨씬 덜 해진 까닭이 나는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면 서사와 영상은 모두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서사와 영상이 일방적 화자나 창작자의 설명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감동의 문은 조금씩 닫히고 단편적인 지식으로 남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도 <천년한>에 담긴 한국적 정서만은 고유하며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가 그려낸 떠돌아 다니는 소리꾼과 악극단원들의 일상이며 판소리가 담은 노곤하고 끈적하며 또한 애닳고 한스러운 면면들을 <천년학>만큼 형상화한 영화는 일찌기 없고 앞으로 또 있을까 싶다. 이것이 <디워>를 보며 <천년학>을 떠올린 이유다. 영화를 통해 무엇 무엇의 정서를 운운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무식에 근거했든 지식에 근거했든 왜곡되는 세상을 결과할 왜곡된 재창조는 없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니 뭐니 하는 장황한 설명은 나중이다. 두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에 철저히 반발하는 사람은 그 논의를 개별적으로 따라가 보면 될테다.
그럼 다시 묻는다. “<천년학>에 있는 한국적 정서는 얼만큼 진실이야?” “글쎄… 내가 다 확인해 보긴 어렵지만, 내가 느끼기론 다 한국적 정서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한국 사람도 잊어가는 한국적 정서까지 고스란히 살려주고 있는 영화라고. 사라졌다는 학마을(선학동)의 그 물길처럼, 그리고 그 산굽이 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던 학들처럼 이제는 되살리기 힘든 어떤 것을 영화 하나에 담아 오랫동안 보물처럼 우리에게 간직하게 해주는 그런 영화라고 말이다.
2007.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