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어

김명인


길을 헤매는 동안 이곳에도 풀벌레 우니
계절은 자정에서 바뀌고 이제 밤도 깊었다
저 수많은 길 중 아득한 허공을 골라
초승달 빈 조각배 한 척 이곳까지 흘려 보내며
젖은 풀잎을 스쳐 지나는 그대여 잠시 쉬시라
사람들은 제 살붙이에 묶였거나 병들었거나
지금은 엿듣는 무덤도 없어 세상 더욱 고요하리니

축축한 풀뿌리에 기대면
홀로 고단한 생각 가까이에 흐려 먼 불빛
살갗에 귀에 찔러 오는 얼얼한 물소리 속
내 껴안아 따뜻한 정든 추억 하나 없이도
어느 처마 밑
떨지 않게 세워 둘 시린 것 지천에 널려

남은 길을 다 헤매더라도 살아가면서
맺히는 것들은 가슴에 남고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막막하여
길목 몇 마장마다 묻힌 그리움에도 채여 절뚝이며
지는 별에 부딪히며 다시 오래 걸어야 한다.





우리에게 선생님이라 불려온 정치인이자 전대통령 김대중선생이 위독하다는 소식 때문일까, 아님 사실은 속이 속같지 않은 내 속때문일까. 그냥 무슨 변명거리라도 있으면 때는 이참이다 싶게 잔뜩 쓸쓸해하고 슬퍼하고 싶어서인 걸까. 너나 나나 다 돌아 앉은 것처럼... 그나 저나 거시기 공황증이란게 내게도 올까 겁난다....
2009/08/10 22:03 2009/08/10 22:03
Posted by 꼼미

김명인 - 안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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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22:45
기묘에게 이 시를 편지 대신 보낼까 하다가, 이리로 돌아 왔다.
그땐 그랬다. 편지라고 보내면, 앞 뒤 없이 그냥 시 한편.
왜 그렇게 시를 읽어 대었을까. 우스갯 소리로 그랬다.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 편진지 시만 봐도 알겠다.


그저 백지인, 주소를 적는 편지 봉투의 반대쪽. 우린 거기에도 시를 적었다. 사춘기의 낭만이었겠지만 딴에 우리는 무척 심각했다. 자꾸 옛날 일이 생각난다. 아주 오래된 옛날들. 내가 지금 말하는 옛날과 지금의 사이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 날 것이다. 그래서 이젠 더이상 변하지 않고 기억속에 가만히 있는 그 옛날일들에 대해 추억한다. 보는 것과 기억하는 건 다르다.

기묘에게 이메일을 쓸까 하다가 차라리 시 한편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펼친 이 시를 읽으니 이 시를 읽었던 기억과 함께 그 주변의 나와 나를 떠받쳤던 '그날들' (김광석의?) 또한 떠오른 거려니...


안개 바다

김명인


안개로군. 누가 말했다. 지독한 안개야.
사방이 끊어지고 문득
되돌아보면 캄캄한 안개 바다. 바다가 안개를 퍼올리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파도를 가려 놓고 있었다.
네가 홀로 웅크린 곳은 어디든지 절벽 같은 파도의 끝.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안개 속에
그물을 던지면서 몸을 버리면서
너도 여기에 묶여 있었느냐?
마침내 스스로 풀 때 꺼져 버리는 네 모습의 안개 위로 내 모습의 안개가
포개더니 천천히 비워져 간다.

무엇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잡히는 거라고 안개는
살아갈수록 어리석고 뼈아픈
우리들의 욕심일까, 욕심의 갈고리를 하고 안개가
바다 쪽에서 끊임없이 우리들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안개 개자 아주
몸을 버린 사람들은 여기 남아 물결에 떠밀리고
덜 젖은 또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몇명씩
다시 안개를 쫓아 바다를 등지고 떠나고 있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다 잊은 듯 매몰차게 떠나온 것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나를 참 매몰찬 년이라 여기고,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다 잊은 듯 저리도 뻔뻔히 살 수가 있나 하였겠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다 잊은 듯'일 뿐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깎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내가 살아 온 날들, 내가 살아 갈 날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2009/07/27 22:45 2009/07/27 22:45
Posted by 꼼미

김명인 - 바다 및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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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13:56
인터넷이 끊어지기 전에 시 한편.

미시건으로 이사 오면서 박스에 넣어 두었던 시집들을 다시 꺼내 놓았다.
화초와 더불어 친구같은 시집들. 그것들을 풀어 놓는 순간부터 집어 들고, 한 편 올려 놓자 싶었다.




바다 및 일기

김명인


시시각각 달라지는 속의 바다를 다스리며
아저씨는
풍풍 뚫어진 그물을 깁고 계셨다.
그의 꿈속의 삶이 허물어지고 바라보는
바다가 하늘을 밀어
한 차례씩 덧문들이 울고 물결들이
은빛 비늘을 갈기며 쏜살같이
먼 수평의 발치로 가라앉을 때에도

작은 어군들은 흘러 보내면서 기다림도 없이
바람 부는 날 양지에 앉아
손바닥의 구덕살도 떼내며 말없이
한 올 귀빠진 그물코를 이루고 계셨다.

안개 속에 아침 해 솟아 느닷없이
멸치 떼들이 그무실을 뒤짚어
모랫벌을 건너 뛰며 단숨에
아저씨는
굳게 묶인 배들을 띄워 내고 있었다.

손 닿는 곳 수면 위엔 소낙비 같은
멸치 떼들이 퐁퐁거리고 둘러친
그물 사이로
은빛 빛살이 가득 담겨 와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흥겹게 뱃전을 두드렸을 때

문득 바람이 일고 일시에
파도가 바다를 가로질러 곤두박질 쳐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우뢰 같은 주먹이 철썩
뱃전을 갈기고 황홀한 물보라가 갈라서

아저씨의 노가 순간 허공을 치고 푸르디뻗센 힘줄이
우지끈 꺾여지는 것이 보였다.
가슴에 섬뜩 와 닿는 까집힌 배의 밑창이
또 한 번 솟구치면서 여반상으로 뒤집혀 가고
아우성치면서 보지 않으려고 마을 사람들은
듣지 않으려고
눈두덩도 쥐어뜯었지만
바다가
순식간에 절벽을 세워 제 아귀를 맞추는 것을
아마도 차마 참혹해서 바로 보지 못하였다.

(김명인 시집, 동두천, 문학과 지성사, 1979)




우리의 인생. 어부로 살았다면 묵묵히 그물을 꿰매었을 테고 바다로 나가는 일이 일상이었을테다. 그러다 바다가 삼키면 운명처럼 죽었을테다. 그걸 다 알고도 그물을 꿰메며 웃는 날이 많았을 게고 바다로 나가며 목청 껏 노래를 불렀을 게다. 그게 우리의 하루 하루의 일기였을 게다...


"95년 2월 어느날 영주가 현수에게..." 라고 내가 적어 놓은 시집.
2009/07/27 13:56 2009/07/27 13:56
Posted by 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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