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플라가 돌아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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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티홀의 음악과 관련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건 노영심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행보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음악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참 희귀하고도 특별한사람이다. 아주 좋은 뜻에서 귀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모차르트적, 쇼팽적, 라흐마니노프적인 곡들을 만들고 연주 할 수 있는 사람. 대중적인 노래에 자신만의 순수성과 자존감을 담을 수 있는 사람. 연약하고 섬세하고 예민해 보이지만 굉장히 건강하고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음악적 삶을 사는 사람. 노영심은 그런 사람이다.

아래의 글 (2005)이 지플라의 1집에 걸었던 나의 희망과 기대였다. 발표할 글이 아닌데도, 정성들여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심히 음반평을 썼던 이유는, 이 음반이 왠지 묻혀버린 명반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벌써 4년이 훌쩍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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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플라 1집, <G-FLA>, 서울음반, 2004. 11.
그 새로운 만남
1. 마주침
음악이란 것이 신비한 순간은, 어떤 소리가 냉랭한 평균율의 음 껍데기 하나로서가 아니라 마치 세상살이 같이 쓰고 달고 맵고 짠 그것들이 한꺼번에 뒤섞인 듯한 미묘하고도 복잡한 덩어리가 되어, 찰나(刹那)보다도 더 간극에 비수(匕首)로 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에 꽂히는 바로 그 때이다. 음악이 내 주변을 밝히고 노래가 내 슬픔을 감싸고 그 미묘한 울림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반짝이는 영감을 준다면 그 소리는 쾌락의 족쇄를 풀고 끝없이 자유로운 세상으로 해방되는 운명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어떤 굉장한 음악을 기대할 것 같다. 이미 거장이라 칭송받은 사람의 음악, 아니면 역사적 보물처럼 과거의 유산이기에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음악을 기대할까. 그렇다면 그 기대에 못 미쳐 고개를 돌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 하려는 음반은 지플라 1집이다. 나는 우리도 모르게 닫혀버린 음악적 상상의 문이 활짝 열린다면 좋겠다. 어떤 음악도 해방된 운명이 되어 ‘위대한 음악의 전당’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그 전당으로 가는 길에는 음악적 태생, 음악의 길이나 난해함, 기교의 높고 낮음으로 통과와 불가를 결정하는 장애물 따윈 없다. 천국행은 천국으로 가는 표를 요행히 손에 넣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승의 삶을 누구와 소통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로 결정된다고 믿듯이, 나는 음악 또한 누구의 피를 받고, 누구의 말로, 누구의 도구를 사용했는가에 관계없이 그 음악이 이 땅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감동을 나누었는가에 따라 해방된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음악의 천국은 그런 곳이고 그래야 하는 곳이라고 믿는다.
지플라 1집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지플라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팀의 노래하는 사람, 정인을 통해서다. 지플라 1집이 나오기 전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정인은 단독으로 부른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를 부르는 정인의 목소리를 버스 속에서 들었다. 버스 안, 운전기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속에서 나오는 처음 듣는 괜찮은 노래는 내 귀가 제 혼자 솔깃해지도록 만들었다. 그게 정인의 노래와 맺은 첫 인연이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운 좋게 똑같이 라디오를 통해 그 노래를 한두 번 더 들으면서 그 노래가 <사랑은>이라는 것을 알았다. 들을 때마다 처음의 느낌이 지속됐다. 평범한 노래를 범상치 않게 부르는 그 느낌.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음악방송을 보다가 <Love Story>의 뮤직비디오와 마주쳤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가 기억한 정인이었다. 그의 특별함을 잘 받쳐주는 또 하나의 리메이크곡 <Love Story>도 흥미로웠다.
2. 목소리
정인의 목소리는 스폰지처럼 폭신폭신한 감정과 풍부한 표정을 그려 낸다. 허스키 보이스에 속하는 쉰 듯 도타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다양한 색깔과 폭넓은 감정의 강약 조절법을 알고 있다. 이것이 그가 가진 그만의 재산이다. 물론 개성 있는 목소리, 음악적 재주가 ‘음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란 언제라도 식상해질 수 있는 하나의 악기일 뿐이고, 그것은 관심의 대상은 될 수 있을망정, 대단한 것을 이루는 보증 수표가 될 수는 없다. 목소리의 변주로 수많은 장식음을 처발라 치장하여 오히려 질리게 만드는 노래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인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노래가 목소리의 기교로 뒤덮여 있지도, 그것에만 의지하고 있지도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그의 노래에 내 귀가 벌떡 섰던 지점은 재주 있어 보이는 사람이 감정과 해석으로 자기의 특성과 능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주어진 곡을 감각적으로 휘어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해석이 그리고 그가 가진 표현의 폭이 노래에 생생한 생명의 숨을 불어 넣는다.
3. 노래들
3-1. <Love Story>, <우리>
이 음반에서 단연 돋보이는 두 곡이다. <Love Story>는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제가다. 이렇게 이미 있던 곡을 그냥 한 번 다시 불러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래처럼 재녹음 하는 것을 흔히 리메이크라 하는데 지플라의 <Love Story>는 리메이크의 전형에 가깝다. 새로운 <러브스토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Love Story>를 완성해 냈기 때문이다. 이 곡은 원곡의 새로운 편곡과 새로 입힌 가사, 곡과 가사에 대한 해석적 연주가 완벽히 조화를 이뤘다. 시작부분의 편곡이 너무나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시작에 사로잡혀 정인의 목소리와 기타를 들으면 원곡에 의지하지 않고 지플라의 <Love Story>를 감상할 수 있다. 프랜시스 래이의 원곡을 이렇게 상상해 낼 수 있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후렴부에 강도를 높이는 정인의 표현력은 가사의 느낌을 잘 담았을 뿐만 아니라 현악기로 부드러워진 반주부와 대조를 이루다가 다시 재 반복부에서 현악기, 기타, 정인의 목소리가 합쳐지는 편곡은 아주 적절하다. 마지막 악절에선 시작부의 선율을 떠올리는 건반이 회상을 일으키며 마무리된다. 전체적으로 곡에 쓰인 모든 재료와 의도와 표현이 하나의 ‘음악’으로 잘 짜인 가운데 익숙함과 신선함, 아름다움과 거칠음이 노랫말이 재현한 형상을 대단히 잘 드러낸 수작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러브스토리>는 떠올려지지 않는다. 영화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는 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지플라의 <Love Story>는 이들이 부르는 가사 그대로 사랑의 힘든 여정을 형상화한 새로운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그 어떤 곳에서보다 정인의 기교가 없는 곡이다. 아주 담백한 노랫가락에 아주 담백한 목소리로 노래되는데 그것이 진실함을 전달하는 최고이자 유일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꿈이라면 좋겠어’로 시작되는 후반부에선 이 음반의 그 어느 노래에서보다도 정인의 절절한 감정이 전달된다. 감정의 전달은 노래와 노래 부르는 이 그리고 듣는 이, 이 세 소통대상을 하나로 묶는 절정의 순간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우리>에는 절정을 맛보게 하는 그 요소가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과도한 목소리의 자랑이나, 장식적 현란함이나, 감정이 지나쳐 과장되고 넘쳐버린 부담스러운 형태가 아닌, 곡과 목소리 모두 기교를 버린 상태에서 오히려 소박하고 담백한 방식으로 발견한 진정한 소통의 순간이기에 더 값지다. 그것이 이 노래를 들으며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Love Story>는 수작이지만 원곡이 이들의 것이 아니기에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을 메워 주는 건 <우리>다. 이궐 작사 작곡의 <우리>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거나 창조적 영감을 던지는 그런 곡이 아니다. 가사가 시적이지도 않으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랩이나 영어 가사와 같은 부수적인 장치가 있지도 않다. 별다른 특별함 없이 오히려 평범하기까지 할 뿐이다. 그런데 그 노래가 삶의 세속적 감정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준다. 음악적 감동이 온다. 그 감동이 또한 표피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고 진실하며 진정성을 느끼게까지 한다. 이는 무엇보다 조화와 담백함과 해석이다. 노랫말과 곡의 조화, 편곡과 노래의 조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한 곡조, 그 곡조와 노랫말을 순수하게 진정성 있게 해석해 낸 목소리. 이들의 어울림이 우리에게 멋진 노래 하나를 선사한 것이다.
3-2. <사랑을 하고 싶어>, <옥탑방>
이 두 곡은 분명 발랄하고 경쾌하다. 편안하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실 감상을 위한 곡보다는 즐기기 위한 곡에 가깝다. 하지만 가볍게 즐길 노래로서 잘 짜인 가락과 노래와 가사는 역시나 정인의 다양한 목소리의 구사와 모자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만의 적절한 노래부르기에 힘입어 무게감 없이도 나름의 존재성을 갖는다.
<사랑을 하고 싶어>만큼 귀엽고 폭신하면서도 좀 더 특색 있는 곡은 <옥탑방>이다. 사랑이 아닌 생활을 주제로 한 가사도 그렇고 반주부도 간단한 리듬에 의지한 전자보다 아기자기한 들을 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심각하지 않은 소품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곡이다. 아쉬운 것은 그렇지만 랩이 이들 노래에 커다란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음반에 담긴 모든 랩에 대한 감상인데, 랩은 이 음반 내내 과연 이 음반에서 꼭 필요한 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랩을 듣는 길지 않은 동안에도 정인의 노래와, 지플라의 음악이 차라리 그리운 것은 분명 랩이 정인의 노래에서 필수적이지 않다는 반증의 하나다. 꼭 필요한 재료인가라는 의심, 랩 부분을 오히려 이들이 가진 실력 있는 음악적 구성과 정인의 노래로 채웠으면 하는 마음을 들게 하는 건, 랩이 지플라의 전체 음반 구성에서 완전한 결합력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도 되겠고 굳이 꼭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말도 되겠다.
3-3. <자연히>, <city>, <G-Flaaaa>
이 곡들은 이 음반에서 실험적 성격을 띠면서 지플라와 정인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는 노래들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자연히>와 <city>는 음반의 앞부분에 나란히 배열하였다. <자연히>는 이 역시 원곡을 가지고 있는데(원곡은 들어보지 못했다), 지플라의 곡으로서도 자연스럽다. 도입곡이라 이름 붙이진 않았지만 이 음반 전체를 유도하는 밝은 분위기의 곡으로 내용상 음반을 여는 역할로 손색이 없다. 드럼과 정인의 이중주로 시徘玖庸?건반이 합세하여 특별한 가사 없이 흘러가는데 전체적인 중심은 ‘연주’에 있다. 가사와 선율이 줄거리를 갖지 않고 악기들과 어울리며 자의 몫을 구현하게 함으로써 ‘노래’만을 중심으로 하지 않겠다는 지플라의 의도를 은연중 내비친다.
<city>를 두 번째 트랙에 넣은 것은 용기다. 그 용기가 가상해 보이고 그래서 더 기특하다. 영어 가사와 ‘다다다다...’ 부분의 선율이 어색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면서 도드라지지만, 도시에 대한 노랫말의 형상화와 아주 도전적으로 들리는 첫 악절, 그리고 정인의 노래로서 값어치가 있는 곡이다. 이 곡에 도입된 영어 가사는 곡 전체의 개성과 가사가 형상화한 대상인 ‘도시’의 이미지를 세련되지만 건조하고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의미로 해석되어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인처럼 가사를 잘 전달하는 편에 속하는 가수가 있고 곡을 완성하는 능력이 잘 갖춰진 지플라라면 그마저도 적절한 우리말 가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더 좋은 곡을 빚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G-Flaaaa>는 그 어느 곡보다도 한영애의 독특함을 떠올리게 한다. 개성 넘치는 목소리의 도입부가 역시나 식상하지 않은 선율선과 어울린다. 하지만 이 곡에서도 역시 랩의 삽입은 정인의 노래로 전체를 끌어가는 것보다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후반부 정인의 자유로운 연주가 돋보인다.
3-4. 나머지
<원더풀>의 시작은 그냥 평범하다. 연주에서도 노래에서도 선율에서도 별다른 특징이나 별다른 자극도 없이 진행된다. 반이 넘도록 평범하게 진행되는 이 노래의 매력은 중반 이후 전조를 거쳐 이루어지는 ‘I can do..' 부분의 갑작스런 옥타브 진행에 있다. 잔잔하게 흐르던 노래의 분위기에 잠깐의 시원한 환기를 시도하면서 곡의 완성도를 반전시킨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변화는 이 곡을 기억하게 하는 뚜렷한 하나의 장치가 된다.
<원더풀>, <다시 한번>, <빙탄지애>, <June>, <True Love>, <cure>은 <Love Story>나 <우리>와 다르다. 이 두 곡이 좀 더 대중과 함께 나누는 감정선을 중시 했다면 이들은 지플라가 가진 특색 있는 느낌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다섯 곡이 다른 듯 하면서 비슷하고 비슷한 듯 하면서 조금씩 다르다. 이중 새롭고 독특한 맛은 <True Love>와 <cure>에 좀 더 담겨 있다. 영어판인 <True Love>는 음악적 착상은 좋은데 랩부터 지루하면서 솔깃해지던 초반의 흥미가 후반으로 가면서 약화한다. 그에 비하면 <cure>는 정인이 부드럽고 끈적한 목소리로 노래의 환상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느낌을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우리>, <다시 한번>, <옥탑방> 등을 작곡한 이궐과 또 다른 면에서 지플라를 만들고 있는 <자연히>, <city>, <원더풀>, <True Love>, <cure>의 작사 작곡가인 윤재경의 독특함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너>는 어쿠스틱 버전이란 이름으로 한 번 더 담아 놓은 <우리>를 제외하면 마지막 곡이다. 곡들에서 보여준 지플라의 익숙한 것들이 점점이 박혀 있어서 별다른 특징도 새로움도 재미도 덜하다. 다른 곡들에 비해 눈에 띄는 결정력이나 새로움도 그다지 발견되지 않아 아쉽다. 정인의 노래도 이 곡에선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음반 전체를 볼 때 뒷부분에선 기대보단 좀 힘이 빠진 듯하다.
<우리>를 반복해서 담은 것이 한 번 더 듣고 싶어 하는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비어 있는 나머지 트랙을 메우려 한 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들게 하는 것은 지플라가 저지른 피할 수 없는 판단착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좀 더 뚜렷한 변화를 주었어야 한다. 시작 부분이 4번 트랙에선 피아노로, 마지막 반복 재생에선 기타로 잠시 이루어진다는 것 외엔 특색 있다고 감지할만한 차이가 없다.
4. 기대
음반은 소설책이기도 하고 시집이기도 하다. 소설책과 시집은 완성감을 가지고 있다. 소설책이 단편 모음집이라도 그것은 ‘작품’이며 시집 또한 그 안에 다양한 시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작품’이다. 음반은 ‘작품’이다. 문학이 작품으로 읽히고, 그림이 작품으로 소장되듯이 음반도 작품으로 읽히고, 소장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시작하는 사람들의 음반은 더욱이 그래야 한다. 음악을 접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오기까지 음반은 음악을 듣는 이와 만드는 이를 연결할 중요한 매개이기 때문이다.
지플라의 음반에는 맛깔스러운 노래도 있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는 노래도 있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음악도 있고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끼를 일깨우는 것 같은 음악도 있다. 다시 말해, 사랑스럽고 달콤하기만 한 발렌타인 데이의 쵸콜렛 상자 같은 음반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지플라의 음반을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고 그런 노래로 채워진 음반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의 욕구가 일지 않는다. 쉽게 빨리 즐길 수 있을망정 오랫동안 기억할 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기억할 거리가 없다는 건 사랑의 마음이 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런 음반은 사랑할 수가 없다. 반면 지플라의 음반에는 애정이 간다. 이 음반에는 그들이 가진 음악적 꿈과 색깔을 담아내고 싶어 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자신들의 ‘작품’이라는 자부심까지 실제로 가졌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지플라 1집에는 새로움이 보이며 도전이 보인다. 새로움과 도전과 의욕이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것이다. 또 음악을 통해 창조적 영감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보인다. 의욕이 있고 고집도 있으며 그에 부응할 실력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도 감지된다. 정인의 재능과 특별한 목소리가 발휘될 수 있는 건 이러한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시작이라는 데 있다. 즉, ‘위대한 음악의 전당’으로 가는 엄청난 첫 발자국이 될 수도 있고, 처음에 맛본 작은 열매의 달콤함에 가야할 먼 길을 망각하고 수렁으로 빠져드는 한걸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인의 목소리에 힘과 맛과 재기가 넘친다 해도 자만과 나태함과 독선과 친구가 된다면 그건 한 순간에 권태로움을 일으키는 시끄러운 잡음으로 변질될 뿐이다. 나는 이들이 대중에게 소통의 즐거움과 더불어 창조와 완성의 기쁨까지 누리게 하는, 쉬지 않고 먼 길을 가는 음악인이 된다면 좋겠다.
2005. 2. 김현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