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거지 같다

2011/02/10 12:47
설날, 오빠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수술을 받았단다. 거기까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몇일이 지난 후에 언니에게 이메일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듯, 지나가는 말인듯, 오빠에게 또 무슨 일인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언니의 마음 고생이 걱정된다고.
아무렇지도 않음을 가장한, 별일 아니라는 듯한 투로 답이 왔다. 어린시절부터 성치 않은 정신으로 하릴없이 집 나가기를 밥먹듯 했던 오빠가 이번엔 설을 얼마 앞두고 길에서 노숙을 하다가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입원해 수술을 받았던 거라고 했다.
내 친오빠 얘기다. 내가 태어 났을 때부터 미국에 오기전까지 내 눈앞에서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사라져본 적 없는, 내가 미치도록 싫어하고 원망하고 지긋지긋해한 나의 피붙이.

해가 바뀌면서 그리운 마음에 찾은 오래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메일로 나눈 서로의 엄마 얘기 속에는 또다른 소설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던 같은 해에 그애의 엄마도 돌아가셨다는 얘기였다. 미국에서 오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귀국 독주회를 하루 앞둔 날, 몇날을 사라져 애를 태우던 엄마의 범상치 않은 부고를 맞았다고 했다. 그애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잘 꾸며진 소설책을 읽고 있는게 아닐까 몇번을 착각했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몇일 새, 주목 받지 못한 허탈한 죽음들에 대해 알게 됐다. 유망한 삼십대 초반의 단편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 갔다. 몇일째 굶주린 채로. 친한 언니의 딸이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고 있는 걸 아는 나에게 남이야기 같이 읽히지 않았다. 또다른 주변에선 세 살짜리 아이가 부모의 매와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갔고 부모 손으로 남몰래 버려졌다. 이 또한 두 아들을 키우고, 어린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나에겐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주변의 어이없는 죽음 하나는 외삼춘이다. 오랜 세월을 쓰러져 무용지물이 된 부인과 세 아들을 돌보며 힘겹게 살았던 분이셨다. 엄마는 자신의 친가족 중에 유일하게 남은 그 오빠와 그 분의 자식들을 늘 애틋해 하셔서 틈나는 대로 돌보아 주었다. 내가 둘째인 번개를 낳고 몇일 되지 않았던 날, 외삼춘은 일을 마치고 평소에 좋아 하시던 술을 몇잔 하시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몇몇의 젊은 치기배들에게 맞아 그 자리에서 돌아 가셨다. 외숙모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고, 남은 세 아들은 하룻밤 사이 부모 잃은 신세가 되었다. 내 엄마가 사신 동안 그렇게 열심히 돌보고 아껴 주었던 그 세 아들들, 그러니까 나의 외사춘 형제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 나는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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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 이어 읽은 <인생>은 올해 본 첫 책이다. 꼼지가 한국 갔을 때 사서 읽고 들고 왔다. 소설적 완성도와 재미로 말하자면 <허삼관 매혈기>보다는 좀 못하다고 느꼈는데도,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 눈물이 났다. 난 그저 평범하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까.

'인생'이란 단어는 참 평범하다 못해 소설의 제목으로 쓰기에는 턱없이 진부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 어느 소설도 우리의 실제 '인생'을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문일테다. 이야기 만큼이나 별것 아닌 제목을 가진 위화의 <인생>에는 허탈하게 죽어버리는 목숨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들의 죽음에는 별다른 드라마조차 없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이야기가 절대로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없을만큼 허무하고 맹탕이어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주인공의 피붙이들이 살붙이들이 죽었는데, 이게 다야? 정말 이렇게 죽어버리고 만거야? 겨우 남은 거라곤, 늙은 소 한마리라는 거야? 주인공 같지도 않은 어떤 점에선 살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런 늙은이 하나 남겨 두고, 그렇게 착하게 산, 그렇게 열심히 산, 그렇게 막 삶을 시작한, 당연히 살아 남았어야 할 그런 생명들을 이따위로 퍽퍽 죽여도 되는 거야?

왜 별볼일 없는 내용과, 별볼일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가득찬 이 소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건가. 왜 위화의 무미건조할만큼 평범한 문장들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녹음기를 그저 받아 적어놓은 것 같은 소설 속 대화가, 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잠시 후에 우리는 또다시 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꼭 내가 그를 위해 뭐라도 해 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 신세타령을 다른 사람이 관심있게 들어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냈던 것이다. - 위화 <인생>, 200쪽.

신세타령. 우리의 삶은 너무 거지 같아서 듣기에도 지겨운 신세타령일 뿐이다. 내 오빠 얘기도 내 엄마 얘기도 내 모든 다른 얘기들도, '그래서 뭐?'라고 하면 그만일, 그저 지지부진한 신세타령에 다름 아니다. 돈으로 떡칠한 미국방송을 봐도, 항쟁으로 뜨거운 이집트를 봐도, 몇십년간을 민주화란 이름으로 싸웠어도 공동의 상식이나 정의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듯한 한국 소식을 들어봐도, 우리 삶은 너덜너덜하고 더럽고 구차한 거지꼴 그 자체다. 아무리 아름다운 듯 특별한듯 매순간마다 각양각색으로 떡칠을 하고 겹겹의 포장을 해도 우리의 삶은 사실 거지같은 '인생'에 불과할 뿐이다.

위화의 <인생>을 읽으면서 끝없이 돌이켜 생각한 건, 개미처럼 살다 개미처럼 죽어가는 인생들에 대해서였다. 이 책이 들려주는 (아니, 들어주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푸구이 노인의 것이 아니라 내 가족과 내 주변의, 당신과 당신 가족과, 당신 주변의 거지같은 인생들인 거다. 그런데 그 거지같은 인생들이 마침내 비추는 희귀한 보석이 무엇인가 하면, 부인과 자식들의 목숨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노인네가 도살 당하는 늙은 소를 가슴 아파하여 소의 목숨을 구해내는 마음과 같은 거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푸구이 노인의 살아 온 이야기를 진심으로 열심을 다해 듣는 '나'는 '냄새나는 똥통'에서 '보석'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보석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희귀하여서 소중한 보물이듯이, 이 거지 같은 삶 가운데 혹여라도 햇빛에 퍼뜩 빛나고 녹아버리는 눈처럼 아름다운 순간이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차하고 너저분한 삶을 지탱하는 보물이고 힘이 아닐까. 소설의 '나'는 푸구이 노인의 이야기에서 찾아낸 보물로 그의 인생을 조금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위화의 <인생>은 이렇듯 미천하기만 한 우리의 아무 것도 아닌 인생속에서 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드물게 찾아 오는 빛나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들이, 작은 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버려진 종이짝 같은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보물인 거라고 속삭여 준다.

'거지 같은 삶에 지지 말고 보물을 찾아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열심히 온힘을 다하면 커다란 똥구덩이 속에 숨겨진 네 삶의 옥석을 찾을 수 있을꺼야' 라고 말이다.



2011/02/10 12:47 2011/02/10 12:47
Posted by 꼼미

김수영 -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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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00:25
강가에서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사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샤쓰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 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Thanksgiving 밤. 문선생님댁에 초대 받아 아이들과 함께 미국식 터어키로 저녁을 먹고 왔다. 우리 아이들과 문선생님의 아들, 그리고 조카, 조카의 친구들 외에 두 분의 여자분이 더 초대 되었다. 문선생님을 포함한 세 분이 다 혼자 사는 분들이다. 문선생님과 한국분은 남편을 각기 일년 전, 오년 전 상처 하셨고, 나머지 한분 드물게 얌전하고 단아해 보이는 미국분은 잠깐 결혼을 하신적이 있다지만 오랫동안 혼자 살아 오신 분이라고 했다. 그분은 특히 오는 12월 초 암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문선생님이 나에게 귀뜸 했던 분이다. 어쨌든, 젊은 청년들과 나이든 아주머니들 사이에 혼자 낀 나는 일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이 말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저 영어와 한국말이 섞여 오가는 대화 속에서 60을 넘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귀를 거치지 않고 마음으로 쑥쑥 들어 왔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앤틱샵에서 산 물병이 얼마나 예쁜지, 자신이 넣어 둔 주식가가 어떤지, 요즘 타이거 우즈의 경기 실적은 어떤지, 등등의 이야기들 사이로, 가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내었던가, 자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어떻게 죽는가인 것 같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돌아 오는 길에는 거칠던 빗줄기가 눈으로 바뀌었다. 이 동네에 내리는 올해 첫 눈이다. 그렇게 말 수를 줄이고 싶었는데도, 조심 조심 눈인지 비인지를 뚫고 돌아 오는 내내, 오늘도 역시나 마음 속엔 후회와 반성 투성이었다. 내게서 쏟아져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행동이든 말이든 모두 얇팍하고 속없어 보이기만 한다.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그토록 모자라 보인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사십대의 사람은 이런 내가 아니었다. 내가 먹은 나이를 인정하기에 내 자신이 너무 모자르단 생각 뿐이다. 그런 생각이 계속 떠나질 않는다.
2010/11/26 00:25 2010/11/26 00:25
Posted by 꼼미
미국 뉴스에는 어느 방송이고 할 것 없이 믿기지 않는, 너무 잔인하고 충격적이서 그저 영화 같기만한, 총기난사 사건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보도 된다. 바로 요 몇일 전엔 비버리 힐스 (Beverly Hills) 에서 차를 달리던 허리우드의 출판업자로 꽤 알려진듯한 로니 체이슨 (Ronni Chasen, 64) 이 다섯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뉴스가 있었다. 오늘 아침엔, 조지아 (Georgia) 의 던우디 (Dunwoody) 라는 곳에서 36살의 아버지가 2살난 아들을 유아원에 내려 준 직후 몇발의 총을 맞고 이유도 없이 즉사 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지난 목요일 아침 9시라고 한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과 영화의 단역처럼 총을 맞고 죽는 그 처참한 비극이 하루에도 몇번씩 한몸이 되는게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늘 이런 사건 사고 이야기다. 지난주 신문 첫기사는 할머니가 집에서 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는데, 총을 쏜 두 범인은 14살 16살 청소년들이었다 (호빵은 지금 13살인데 말이다). 내 아들 또래의 아이들조차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게 낯설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거다. 이런 소식을 한두번 듣고 사는 것도 아닌데도 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두려움에 치가 떨린다. 그래도 이런 충격에 아직도 잘 무뎌지지 않는 나의 감각에 차라리 감사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사건들이 아무렇지 않게, 시시한 사건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나의 인간적 감성과 감각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아침, 학교 버스를 타러 나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서도 몇번씩 되내다 보았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그 짧은 순간 농담을 나누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 그들의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 혹여라도 짙은 먹구름이 낄까 선듯 두려워졌다.
2010/11/23 10:13 2010/11/23 10:13
Posted by 꼼미

마음에 품은 말

 | 하루
2010/07/14 22:13
트위터에 어떤 사람이 올린 글.

"과거의 좋은 일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면
그만큼 긍정적인 기억을 강화하게 되고,
과거의 나쁜 일들을 용서하는 법을 익히면
과거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다."


좋은 일들에 대한 끝없는 감사하는 마음이 자리잡기 시작한 건, 확실히 자동차 사고 이후가 아닌가 싶다. 내가 이렇게 살아 가는 일이,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거나) 통해서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긍정적인 기억이 강화 되었겠지. 그렇다고 믿는다.

용서와 관련해서는.... 난 용서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잘잘못을 너무 따지려 해서 소중한 것도 허무하게 잘 잃고 마는 그런 사람이다. 내 고통을 부여잡고 죽는 한이 있어도 용서하지 못할 일에 대해서는 용서 할 마음이 없는 사람. 그런 내가 요즘은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조금씩 헤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게 사람의 일이고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이 어떤 앙금은 용서처럼 녹여 내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다.

내가 과거의 나쁜 일들을 용서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과거의 고통들에서 조금씩 헤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매일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집 주변의 화초를 돌아 보는 나를 보면서 더욱 분명해 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가. 내 인생이 산처럼 물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해져도 좋겠다 싶다.
2010/07/14 22:13 2010/07/14 22:13
Posted by 꼼미

방학 첫 날 아침 산책

 | 하루
2010/06/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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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건의 여름은 한낮의 해는 뜨거워도 아침 저녁의 바람은 상큼하다. 간간히 비가 오지만 날이 맑으면 하늘은 높고 파랗다.

미국도 변하는지, 집안에서 신발을 벗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이나 아침 저녁으로 개가 아닌 '사람'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소박한 단독주택 단지로 이사 온게 날이 갈 수록 편안하고 좋다.
눈에 띄게 좋은 집들이 있는 것도 아니요 좋은 시설이나 환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빈집들마저 눈에 띄는 경제사정 때문에 전체 단지가 완공되지 못하고 반은 산림 우거진 공터로 남겨져 있는 조용한 동네가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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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9 17:58 2010/06/19 17:58
Posted by 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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