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오빠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수술을 받았단다. 거기까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몇일이 지난 후에 언니에게 이메일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듯, 지나가는 말인듯, 오빠에게 또 무슨 일인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언니의 마음 고생이 걱정된다고.
아무렇지도 않음을 가장한, 별일 아니라는 듯한 투로 답이 왔다. 어린시절부터 성치 않은 정신으로 하릴없이 집 나가기를 밥먹듯 했던 오빠가 이번엔 설을 얼마 앞두고 길에서 노숙을 하다가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입원해 수술을 받았던 거라고 했다.
내 친오빠 얘기다. 내가 태어 났을 때부터 미국에 오기전까지 내 눈앞에서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사라져본 적 없는, 내가 미치도록 싫어하고 원망하고 지긋지긋해한 나의 피붙이.

해가 바뀌면서 그리운 마음에 찾은 오래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메일로 나눈 서로의 엄마 얘기 속에는 또다른 소설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던 같은 해에 그애의 엄마도 돌아가셨다는 얘기였다. 미국에서 오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귀국 독주회를 하루 앞둔 날, 몇날을 사라져 애를 태우던 엄마의 범상치 않은 부고를 맞았다고 했다. 그애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잘 꾸며진 소설책을 읽고 있는게 아닐까 몇번을 착각했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몇일 새, 주목 받지 못한 허탈한 죽음들에 대해 알게 됐다. 유망한 삼십대 초반의 단편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 갔다. 몇일째 굶주린 채로. 친한 언니의 딸이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고 있는 걸 아는 나에게 남이야기 같이 읽히지 않았다. 또다른 주변에선 세 살짜리 아이가 부모의 매와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갔고 부모 손으로 남몰래 버려졌다. 이 또한 두 아들을 키우고, 어린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나에겐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주변의 어이없는 죽음 하나는 외삼춘이다. 오랜 세월을 쓰러져 무용지물이 된 부인과 세 아들을 돌보며 힘겹게 살았던 분이셨다. 엄마는 자신의 친가족 중에 유일하게 남은 그 오빠와 그 분의 자식들을 늘 애틋해 하셔서 틈나는 대로 돌보아 주었다. 내가 둘째인 번개를 낳고 몇일 되지 않았던 날, 외삼춘은 일을 마치고 평소에 좋아 하시던 술을 몇잔 하시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몇몇의 젊은 치기배들에게 맞아 그 자리에서 돌아 가셨다. 외숙모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고, 남은 세 아들은 하룻밤 사이 부모 잃은 신세가 되었다. 내 엄마가 사신 동안 그렇게 열심히 돌보고 아껴 주었던 그 세 아들들, 그러니까 나의 외사춘 형제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 나는 전혀 모른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 이어 읽은 <인생>은 올해 본 첫 책이다. 꼼지가 한국 갔을 때 사서 읽고 들고 왔다. 소설적 완성도와 재미로 말하자면 <허삼관 매혈기>보다는 좀 못하다고 느꼈는데도,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 눈물이 났다. 난 그저 평범하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까.
'인생'이란 단어는 참 평범하다 못해 소설의 제목으로 쓰기에는 턱없이 진부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 어느 소설도 우리의 실제 '인생'을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문일테다. 이야기 만큼이나 별것 아닌 제목을 가진 위화의 <인생>에는 허탈하게 죽어버리는 목숨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들의 죽음에는 별다른 드라마조차 없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이야기가 절대로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없을만큼 허무하고 맹탕이어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주인공의 피붙이들이 살붙이들이 죽었는데, 이게 다야? 정말 이렇게 죽어버리고 만거야? 겨우 남은 거라곤, 늙은 소 한마리라는 거야? 주인공 같지도 않은 어떤 점에선 살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런 늙은이 하나 남겨 두고, 그렇게 착하게 산, 그렇게 열심히 산, 그렇게 막 삶을 시작한, 당연히 살아 남았어야 할 그런 생명들을 이따위로 퍽퍽 죽여도 되는 거야?
왜 별볼일 없는 내용과, 별볼일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가득찬 이 소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건가. 왜 위화의 무미건조할만큼 평범한 문장들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녹음기를 그저 받아 적어놓은 것 같은 소설 속 대화가, 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잠시 후에 우리는 또다시 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꼭 내가 그를 위해 뭐라도 해 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 신세타령을 다른 사람이 관심있게 들어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냈던 것이다. - 위화 <인생>, 200쪽.
신세타령. 우리의 삶은 너무 거지 같아서 듣기에도 지겨운 신세타령일 뿐이다. 내 오빠 얘기도 내 엄마 얘기도 내 모든 다른 얘기들도, '그래서 뭐?'라고 하면 그만일, 그저 지지부진한 신세타령에 다름 아니다. 돈으로 떡칠한 미국방송을 봐도, 항쟁으로 뜨거운 이집트를 봐도, 몇십년간을 민주화란 이름으로 싸웠어도 공동의 상식이나 정의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듯한 한국 소식을 들어봐도, 우리 삶은 너덜너덜하고 더럽고 구차한 거지꼴 그 자체다. 아무리 아름다운 듯 특별한듯 매순간마다 각양각색으로 떡칠을 하고 겹겹의 포장을 해도 우리의 삶은 사실 거지같은 '인생'에 불과할 뿐이다.
위화의 <인생>을 읽으면서 끝없이 돌이켜 생각한 건, 개미처럼 살다 개미처럼 죽어가는 인생들에 대해서였다. 이 책이 들려주는 (아니, 들어주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푸구이 노인의 것이 아니라 내 가족과 내 주변의, 당신과 당신 가족과, 당신 주변의 거지같은 인생들인 거다. 그런데 그 거지같은 인생들이 마침내 비추는 희귀한 보석이 무엇인가 하면, 부인과 자식들의 목숨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노인네가 도살 당하는 늙은 소를 가슴 아파하여 소의 목숨을 구해내는 마음과 같은 거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푸구이 노인의 살아 온 이야기를 진심으로 열심을 다해 듣는 '나'는 '냄새나는 똥통'에서 '보석'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보석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희귀하여서 소중한 보물이듯이, 이 거지 같은 삶 가운데 혹여라도 햇빛에 퍼뜩 빛나고 녹아버리는 눈처럼 아름다운 순간이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차하고 너저분한 삶을 지탱하는 보물이고 힘이 아닐까. 소설의 '나'는 푸구이 노인의 이야기에서 찾아낸 보물로 그의 인생을 조금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위화의 <인생>은 이렇듯 미천하기만 한 우리의 아무 것도 아닌 인생속에서 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드물게 찾아 오는 빛나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들이, 작은 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버려진 종이짝 같은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보물인 거라고 속삭여 준다.
'거지 같은 삶에 지지 말고 보물을 찾아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열심히 온힘을 다하면 커다란 똥구덩이 속에 숨겨진 네 삶의 옥석을 찾을 수 있을꺼야' 라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