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많은 탓인지 지지리 복이 없는 탓인지, 어쨌든 난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산다. 꼼지와 호빵과 번개. 머리에 피가 막 마르던 시절(?)부터 봐온 꼼지는 이제 중년이란 이름을 붙이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점에 접어 들었고, 이제 십대 소년들이 된 두 아들 호빵과 번개는 저것들이 어릴 때가 있었나 싶게 4차원 세계로 빨려가듯 후다닥 청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가 남자가 주인공인 두권의 소설책이 남얘기 같지만은 않았다.

책들을 겹쳐 읽다 보니 우연히 중년을 넘어선 두 남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고 거의 같은 시기에 끝내게 되었다. 한국태생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의 <Aloft> 와 중국의 젊은 작가 (조만간 '젊은'이란 말을 떨어져나갈 듯)로 불리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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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ft> 는 꼼지가 산 책이다. 기억컨데, 꼼지는 책의 내용보다는 작가에 호기심을 가졌고 당시 세일에 세일을 거쳐 바닥을 치고 있던 그 가격이 그의 호주머니를 열게 했다. 하지만 내가 읽어 주기 전까지 책꽂이에 고이 모셔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창래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라 다른 책에선 그가 어떤 문체나 경향을 가졌는지 잘 모른다. 적어도 이 책에선 작가의 '한국적' 경향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적' 허무맹랑 충격 소재나 경향도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작가 진짜 별 것 아닌 수다를 잘도 늘어 놓는 군' 싶을 만큼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에 꼬리를 달고 달아 늘고 늘이고 채워가는 수법으로 소설 전체를 엮고 있다. 주인공인 제롬의 목소리로 채워진 이 소설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미국적이지 않은 분명한 미국 소설, 그러니까 완전한 미국인의 눈으로 본 삶의 건조하고 보잘 것 없는 면면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겠다. 미국시장에서도 한국시장에서도 인기가 없었을 꺼라는 걸 장담해 볼 수 있을 만큼 이렇다할 기승전결도 없는 소설이다. 읽다 치워버리고 싶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지루하고 별 재미도 없지만 이상하게 읽다 치워버릴 수는 없는 그런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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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젊은 작가라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앤아버친구 책이다. 앞장에 그 친구 동생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책도 들쳐본 건 꼼지가 먼저였다. 그가 책장을 훌떡 훌떡 넘기며 "흠, 치과의사란 직업을 버리고 소설가가 되었다네... 피 팔아 살아가는 중국남자 이야기네..." 말하기도 했지만 워낙 "소설은 왜읽지:"라며 '정치'와 '역사'를 전공아닌 전공처럼 삼고 사는 그라 그랬는지 역시나 완독하진 않았다. 짜투리 시간에 한국책을 짬짬이 읽는 나는 두껍지도 않은 소설이니 한 번 읽어보자 심정으로 번개 축구하러 따라가는 길에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읽는 사람을 웃기는지, 그러면서도 마치 침으로 아픈 혈자리 짚어내듯 사람 마음을 뜨끔하게 하는지, 이 책을 읽으며 기대 이상의 재미를 보았더랬다.  

이창래 소설의 주인공은 미국남자 제롬 배틀 (Jerome Battle) 이고 위화 소설의 주인공은 허삼관이다. 한 때는 소년이었을 이 두 남자는 미국의 현대와 중국의 근대라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선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둘 모두 청춘을 거쳐 부인을 맞아 그들만의 둥지를 틀었고, 그저 하늘이 주는 대로 자식 낳고 살다 이게 내 삶인지 가족이란 이름의 딸린 식구들의 삶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도 이른다. 달린 아이들은 먹을 것이든 사랑에든 조금만 방심해도 주려 치명타를 입기 쉽상이고 동반자라고 이름하는 부인은 가족 생계와 본인의 외로움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남편보다는 돈을, 남편이 처한 입장 보다는 자신의 갈망을 바라본다.

제롬 (일명 제리 Jerry) 은 복지관에 맡겨진 아버지와 더불어 이제는 독립한 딸과 아들을 두었다. 제롬의 아버지는 전화 저쪽에서 경로원에서 꺼내달라거나 가족 모임에서 똥을 퍼질러 싸서 그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끝내는 경로원을 몰래 도망치며 그의 일상을 괴롭힌다. 부모만 그런가. 제롬의 할아버지대부터 내려온 가업인 조경사업을 자기에게서 물려받은 아들은 회사가 기울어 가는 것을 숨기고, 잘난척 만땅으로 똑똑한 교수지망생 딸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인기없는 소설을 쓰는 남자와 결혼해 임신과 더불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가져다 준다.

허삼관은 피를 판 돈으로 꼬셔 얻은 부인 아래 부인이 결혼 직전 내통한 남자의 아들인 일락과 자신의 피를 받은 이락, 삼락의 세 아들을 두었다. 자신이 가장 예뻐하며 11년을 키운 아들이 남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는 부인을 욕하고 그 아이들을 차별하며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기도 하지만, 문화혁명 과정에서 간통녀로 비판 받는 아내에게 몰래 밥과 반찬을 날라주는 역사의 물결 속에서 살기 위해 헤엄쳐 가는 보통 남자다. 키운 정과 나은 정 모두를 위해 목숨같은 피를 팔고 와서도 자식의 상관을 접대하며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는 특별히 똑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아니 되려 사람들에게 '자기 자식도 아닌 아들을 키우는 덜떨어진 놈'으로 손가락질 받는 멍청하고 답답해 보이는보통 아버지다.

제롬은 사업에선 이미 은퇴하고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에 끼어 죽은 아내의 빈자리 대신 오랫동안 애인으로 지내온 여자 하나 어쩌지 못하고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허삼관은 할아버지에 이어 자신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던 삼춘까지 잃고 그저 한 사람의 남편이자 세 아이들의 아버지로 삶을 헤쳐 나간다. 피같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피를 팔아 돈을 만드는 가운데 친구를 만나고 친구를 잃는다. 피팔다 죽어가는 친구를 보고도 간경화에 걸린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피를 팔러 길을 나선다.

제롬도 허삼관도,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서라도 절대 인용될 것 같지 않은 역사라는 강물 아래에 잠겨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남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특별히 마초도 아니요 특별한 군자도 아니다. 태어 났으니 살아 가고, 살아 가고 있으니 지친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요새말로 시대의 찌질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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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만도 세 명의 남자가 있으니, 이 세 남자들도 시대의 찌질이로서 각자 부여받은 한 시대를 살아 가겠지. 세 남자에게 약간 연민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불쌍하다고 생각진 말자. 찌질이가 한 둘인가. 남의 집 남자들도 자세히 뜯어 보면 모두 별 다를 것 없는 찌질들일게 분명하다(고 우기지 뭐). 비록 찌질하게 살아 가더라도, 혼자 비행기를 타며 환상에 젖든 피를 팔아 황주를 마시든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며 삶을 여정을 이어 가주기만 한다면 곁에서 보는 재미와 뿌듯함이 이 두 소설을 너끈히 넘어서지 않을까...


2010/04/06 16:58 2010/04/06 16:58
Posted by 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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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글 쓰는 것이 '전달하는' 것이라면,
문학적 대상물 '언어를 넘어선' 전달,
즉 말들에 의해 생산되었다가
말들에 의해 재차 막힌
무의미 작용의 '침묵'에 의한
전달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문학적인 이야기다'라는 것은
'당신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한다
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 문학적 대상물이 독자에게 전달해야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침묵의 비(非)지식이 어떠한 것인가 알아보자.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문학 작품이 지닌 '의미작용의 내용'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 침묵에로
거슬로 올라가는 일일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제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 중에서-

그냥 뜻없이 편 곳,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인 듯 싶지만, 한글번역 첫 문장엔 주어가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단번에 알 수가 없을 만큼 번역이 명료하지 않다. 원문 때문 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답답한 번역이란 생각을 안할 수 없다.

그래도, 어쨌든,... 문학은, 무언가를 '언어를 넘어서 하는' 전달이란 말에 눈이 머문다. 간혹 우리가 말하는, 행간을 읽으라는 것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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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무 것도 아닌', 즉 '침묵의 비지식'을 알려면 '보이는 내용'이 아닌 '둘러싼 근본적 침묵'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들어 온다. 글쓴이가 말과 말 사이에 침묵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걸꺼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 이창래의 <Aloft> 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거다. 그의 진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과 그려지는 행동 사이에 있다고 생각 했다. 즉, 글자가 없는 그곳. 그리고 내가 찡하고 공감하는 것은 바로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새겨 놓은 그의 감정과 생각이다.

인문학 책은, 가끔 시집같다. 내 맘대로 읽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내 맘대로 느낄 수 있는. 번역서일때는 재해석 과정(?)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이 가진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옆에 두어 본다. 마치 오늘과 내일을 점치는 패들마냥.

...

사실, 이건 언니의 책이었고, 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한 기억이 없다. 지금까지. 그런데 오랜 세월 그래 왔듯이, 이걸 지금 여기, 미시건 한 시골 구석탱이에 박혀서도 가끔 들추고 있는 거다. 근데, 책을 들추다가 마지막 책갈피에서 뭔가 떨어졌다. 쪽지 한 장. 이게 왜 여기있지... 이 쪽지에 대한 아무런 실마리가 없다. 그저, 아직도 종종 기억하곤 하는 후배의 이름이 써있는 것 외에.

언니, 책 잘 봤어요.
책 고마웠고 언니도 실기시험 열심히 봐요.
차돌멩이 언니에게
은경이가.

내가 기억하는 그 은경이가 맞겠지...하는 생각, 그리고 그땐 그애에게 내가 차돌멩이 같았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 그리고는 그 쪽지를 다시 있던 자리에 끼워 넣어 두다.
2009/09/20 00:18 2009/09/2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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