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간의 방학 중 반이 갔다. 늘 그래 왔듯이 즉흥적으로 디트로이트 포드 박물관에 한 번 다녀 온게 전부다. 눈은 하루가 멀다고 오니 강원도 어디 스키장 근처에라도 살고 있는 기분이다. 가끔 그 눈 속을 걷는 산책을 하는건 그래도 특별한 일에 속한다. 그저 아이들은 제 좋아하는 것들을 하게 내버려 두고 (거의는 컴퓨터 게임이나 컴퓨터 비디오 시청이다) 이 책 저 책 들추면서, 이 영화 저 영화를 오가면서, 꼼지와 함께 이 얘기 저 얘기로 건너 뛰면서, 가끔 크게 웃고, 가끔 크게 허무해 하면서 이 방학을 보내고 있다.
몇일전엔 꼼지가 '왜 지금의 20대는 자기 안위와 돈밖에 모르게 된걸까'란 화두를 던졌다. '파쇼 아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475와 386의 자식들일 텐데...'라는 말을 이으면서. 물론 나도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젊은 세대는 그저 구세대, 기성세대, 그리고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제대로된 대꾸를 붙이지 못했고, 그 주제는 제대로된 대화토막이 되지 못한 채 그날 아침상에서 사라졌다.
오늘 아침엔 꼼지와 비정규직 문제와 알라딘 불매운동에 관해 짧은 사담을 나눴다. 비정규직에 대한 법률안이 통과된 건 노무현 때라고 꼼지가 말했다. 왜 그랬데... 라고 내가 말했다. 꼼지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며 진위를 좀 더 알기 위해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했다. 나 역시 그 세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아주 최근, 알라딘에 내 서재를 연 사람으로서 생각해 보았다. 나같으면 어느 쪽일까.
오로지 문제가 해고된 비정규직 한사람이나 알라딘에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합리를 보여주는 분명한 한가지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걸테다. 알게 모르게 심했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의 도화선이 된 것도, 한 흑인아이가 피부 색깔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무척 먼 학교를 걸어다녀야 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당시 인종차별 문제에서 어디 가장 큰 '차별'이기나 했을까. 그보다 더 한 일도 무척 많았을 테다. 하지만 그 문제가 법정싸움으로 이어지고 그 작은 물구멍을 통해 봇물처럼 같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강물은 그 물줄기를 바꾸었던 게 아닐까. 비정규직 문제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모순의 하나일 뿐 전체가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그걸 제기하고 나선 피해 당사자와 얼떨결에 화살받이가 된 알라딘은 둑을 떠뜨리는 작은 물구멍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런 걸 알려 줄 신은 없고 있는 거라곤 무당들 뿐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알라딘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또는 알라딘을 감싸는 사람들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억울하고 느끼고 말하는 그 순간 그 자체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노무현이 많이 부족한 대통령이었더라도 그는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측은하다. 자기 삶의 부끄러움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내가 가진 부끄러움에 대해 얼마만큼 스스로 부끄러워하면 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 삶을 반성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일단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오는 감정이다. 그런 판단과 깨달음 없이 부끄러움이란 감정에 도달할 수는 없다. 자신의 윤리의식으로는 잘못된 게 없는 데 어떻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미시건 시골 구석에 박힌 내가 왜 알라딘 불매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내가 닿는 세상이란 이렇게 뜨문 뜨문 책과 블로그족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세상에 대한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안철수가 <무릎팍 도사>에 나와 말했던 것과 같이 '사회가 나에게 준 어떤 것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면 나는 내 스스로가 인생의 패자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되는 걸까. 가끔 내가 패자같이 느껴질 땐 무척 우울하다. 하지만 그 우울함이 싫다고 내가 패자라고 인정되는 나의 판단과 의식을 거부하면 그게 내 삶의 더 큰 빚이 되는 거라고 내 머리와 가슴이 말한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과 패배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한다.
우리가 사는 삶은 몇십년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고, 그 몇십년은 자체의 역사와 시대상황에 또한 한정될 뿐이다. 우린 그 속의 윤리와 그 안의 법체계와 거기에 내재된 관습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부끄러움도 그 잣대 안에서 측량될테다.
어떤 사회적인 논쟁거리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지식인들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 평소에 잘도 지껄이던 그들은 긴박한 사안에서 입을 다물기도 한다. 행동이 앞서면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은 신중함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세상은 그의 신중함을 기다려만 주지 않는다. 진화의 역사 속에서 각각의 생명체들이 선택을 해왔듯, 인간인 우리가 사는 일도 계속된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 많은 지식과 논리로도 간파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어떤 사안에서든 제대로된 지식인이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맞다고 여긴다. 선택 후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든 중요치 않다. 어떤 지식인의 선택은 그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 될테니. 두려워할 게 없어야 맞는게 아닐까. 선택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것을 반성하고 나아가는 것도 그 사람을 보여주는 일이다.
알라딘이 책팔아 먹는 곳이니 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이 사안에 민감해야 하고 가장 최선의 조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게 내 상식이다.그런데, 이러한 지식인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당당히 선택하고, 정당히 평가하며, 겸허히 반성하고, 지치지 않고 전진하는 지식인들을 보고 싶다.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의 모순. 출판윤리와 기업논리 사이에서 난감해 하는 것 같은 알라딘. 그 사이에 낀 책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들. 그 삶의 파노라마 가운데서 나는 노무현이 가졌던 부끄러움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집안에 틀어 박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번역은 끝나가지만 아직 다 마무리 하지 못했고, 책에 대한 생각들은 머릿속에 가득해도 몸은 게으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나날. 그런 내가 부끄럽다. 그런 나는 인생의 패자라고 느낀다.
몇일전엔 꼼지가 '왜 지금의 20대는 자기 안위와 돈밖에 모르게 된걸까'란 화두를 던졌다. '파쇼 아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475와 386의 자식들일 텐데...'라는 말을 이으면서. 물론 나도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젊은 세대는 그저 구세대, 기성세대, 그리고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제대로된 대꾸를 붙이지 못했고, 그 주제는 제대로된 대화토막이 되지 못한 채 그날 아침상에서 사라졌다.
오늘 아침엔 꼼지와 비정규직 문제와 알라딘 불매운동에 관해 짧은 사담을 나눴다. 비정규직에 대한 법률안이 통과된 건 노무현 때라고 꼼지가 말했다. 왜 그랬데... 라고 내가 말했다. 꼼지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며 진위를 좀 더 알기 위해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했다. 나 역시 그 세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아주 최근, 알라딘에 내 서재를 연 사람으로서 생각해 보았다. 나같으면 어느 쪽일까.
오로지 문제가 해고된 비정규직 한사람이나 알라딘에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합리를 보여주는 분명한 한가지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걸테다. 알게 모르게 심했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의 도화선이 된 것도, 한 흑인아이가 피부 색깔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무척 먼 학교를 걸어다녀야 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당시 인종차별 문제에서 어디 가장 큰 '차별'이기나 했을까. 그보다 더 한 일도 무척 많았을 테다. 하지만 그 문제가 법정싸움으로 이어지고 그 작은 물구멍을 통해 봇물처럼 같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강물은 그 물줄기를 바꾸었던 게 아닐까. 비정규직 문제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모순의 하나일 뿐 전체가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그걸 제기하고 나선 피해 당사자와 얼떨결에 화살받이가 된 알라딘은 둑을 떠뜨리는 작은 물구멍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런 걸 알려 줄 신은 없고 있는 거라곤 무당들 뿐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알라딘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또는 알라딘을 감싸는 사람들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억울하고 느끼고 말하는 그 순간 그 자체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노무현이 많이 부족한 대통령이었더라도 그는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측은하다. 자기 삶의 부끄러움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내가 가진 부끄러움에 대해 얼마만큼 스스로 부끄러워하면 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 삶을 반성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일단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오는 감정이다. 그런 판단과 깨달음 없이 부끄러움이란 감정에 도달할 수는 없다. 자신의 윤리의식으로는 잘못된 게 없는 데 어떻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미시건 시골 구석에 박힌 내가 왜 알라딘 불매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내가 닿는 세상이란 이렇게 뜨문 뜨문 책과 블로그족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세상에 대한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안철수가 <무릎팍 도사>에 나와 말했던 것과 같이 '사회가 나에게 준 어떤 것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면 나는 내 스스로가 인생의 패자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되는 걸까. 가끔 내가 패자같이 느껴질 땐 무척 우울하다. 하지만 그 우울함이 싫다고 내가 패자라고 인정되는 나의 판단과 의식을 거부하면 그게 내 삶의 더 큰 빚이 되는 거라고 내 머리와 가슴이 말한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과 패배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한다.
우리가 사는 삶은 몇십년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고, 그 몇십년은 자체의 역사와 시대상황에 또한 한정될 뿐이다. 우린 그 속의 윤리와 그 안의 법체계와 거기에 내재된 관습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부끄러움도 그 잣대 안에서 측량될테다.
어떤 사회적인 논쟁거리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지식인들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 평소에 잘도 지껄이던 그들은 긴박한 사안에서 입을 다물기도 한다. 행동이 앞서면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은 신중함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세상은 그의 신중함을 기다려만 주지 않는다. 진화의 역사 속에서 각각의 생명체들이 선택을 해왔듯, 인간인 우리가 사는 일도 계속된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 많은 지식과 논리로도 간파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어떤 사안에서든 제대로된 지식인이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맞다고 여긴다. 선택 후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든 중요치 않다. 어떤 지식인의 선택은 그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 될테니. 두려워할 게 없어야 맞는게 아닐까. 선택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것을 반성하고 나아가는 것도 그 사람을 보여주는 일이다.
알라딘이 책팔아 먹는 곳이니 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이 사안에 민감해야 하고 가장 최선의 조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게 내 상식이다.그런데, 이러한 지식인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당당히 선택하고, 정당히 평가하며, 겸허히 반성하고, 지치지 않고 전진하는 지식인들을 보고 싶다.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의 모순. 출판윤리와 기업논리 사이에서 난감해 하는 것 같은 알라딘. 그 사이에 낀 책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들. 그 삶의 파노라마 가운데서 나는 노무현이 가졌던 부끄러움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집안에 틀어 박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번역은 끝나가지만 아직 다 마무리 하지 못했고, 책에 대한 생각들은 머릿속에 가득해도 몸은 게으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나날. 그런 내가 부끄럽다. 그런 나는 인생의 패자라고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