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영화 사이를 종횡무진 오간, 1942년 생, 그러니까 이제 칠십 생을 향해 걸어가는, 결코 미녀축에 끼지 못하는 바브라 스트라이젠드 (Barbra Streisand) 를 좋아한다. 반즈앤 노블에 갔다가 그녀의 새 음반을 산게 연말 분위기가 시작되기 전이다. 그녀의 새 음반은 그저 그녀가 지금까지 노래해온 그대로 였다. 아무 것도 새로울 것 없는 그 노래들을 들으며 온몸이 느슨해지고 엄마의 기일과 한해의 결말로 향해가는 시간에 좀 더 관대해지고 있었다. 음반의 제목은 <Love is the Answer>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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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음반을 사던 날, 싼 값에 파는 그녀의 영화 <The Way We Were, 1973> 도 함께 샀다. 같은 제목의 노래도 좋아 하지만 중학교 땐가 TV 명화극장 (아마도) 을 통해 본 그 영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로보트 레드포드 (Robert Redford) 와 바브라 스트라이젠드가 나오는 영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영화.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대학에서 정치와 사회운동의 선두에 섰던 여자와 교내 운동 (운동권의 '운동'이 아니라 정말 운동, 여기선 풋볼) 스타로 여대생들의 우상이던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던 자리'와 '함께 있던 순간'과 그리고 다시 돌아간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역시나 그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라 장면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여자가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교내 학생들을 선동하는 장면. 그녀가 남자에게 울며 전화를 하는 장면. 그들이 헤어진 후, 다시 만난 거리에서 여전히 서명 용지를 나누어주며 거리의 시민들을 선동하는 장면. 이들이 어떤 황홀한 사랑의 순간을 나눴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지 하는 사실들은 다시 영화를 보기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를 다시보며 내가 돌려 받은 것은 주인공 여자가 강렬히 다가왔던 장면들을 기억했던 사춘기 시절의 나 자신이다.

당시 내가 동경 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꿈꾸던 청년시절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꿈과 동경의 잔상들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에서 여자는 당당했고 자신의 의지가 있었지만, 사랑은 그녀의 당당함과 의지와 당돌한 사상과 행동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할 것은,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바꾸거나 아니면 '그녀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 가는 것이다. 그녀도 그 남자도 이 영화에선 둘이 함께하는 사랑보다 각자의 '자리'를 선택한다. 사랑의 해피 앤딩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영화의 끝장면은 씁쓸하고 외로워 보이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주인공 바바라 스트라이젠드가 참으로 옹골차게 멋져 보이기만 했던 그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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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 역시 싼값에 나온 것을 얼른 사두고 여태껏 다시 보기를 미루어 왔던 <The Hours, 2002> 를 다시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의 <Mrs. Dalloway> 소설에 자극을 받아 마이클 커닝햄 (Michael Cunningham) 이 1998년에 쓴 소설을 영화한 작품이다. 살아 있는 전설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립 (Meryl Streep)이 달로웨이 부인이로 나온다. 물론, 이 영화에선 나머지 두 주인공 여배우, 니콜 키드먼 (Nicole Kidman) 과 줄리언 무어 (Julian Moore) 의 연기도 전설로 남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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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달로웨이 부인> 은 영화 <The Hours> 의 줄리안 무어처럼 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안주인이 보내는 딱 하루의 일과다. 그 딱 하루의 순간을 통해 우리는 달로웨이 부인의 과거를 끌어 안는 그녀 삶의 총체를 본다. 꽃을 사고, 바느질을 하고,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안주인. 달로웨이씨의 부인으로 딸이 있는 엄마로서의 그녀가 사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과거 경험과 생각과 감정과 꿈꾸었던 이상을 만난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달로웨의 부인>의 변주와 같다. 내가 산 DVD 에서 저자 마이클 커닝햄은 어느날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 여자가 교감하는 순간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걸 소설로 썼을 때 소설이 팔리고 또 팔려 나갔다고 했다. 그 소설을 팔리게 했던 건,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그 시대에 갈망했던 것들이 여전히 갈구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달로웨이 부인은 하루 (그녀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속에 있다. 꽃을 사고 연인이자 친구 남자를 위한 만찬을 준비한다. 그 하루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끝없이 교류하는 과거의 순간들 때문에 울고 웃는다. 그리고 딸에게 말한다.
"그냥 평범했던 그 날 아침, 커텐을 걷고 걸어 나오면서, 나는 이게 행복의 시작이구나 생각했지. 모든게 완벽한 것 같았고 모든게 행복한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건 행복의 시작이 아니었어. 그 순간이 바로 행복, 바로 그것이었던거야. 바로 그 때가 말이야 (Right then)."
(영화의 영어 대사 그대로를 번역한 것 이 아니라, 영어로 듣고 한국어 구조로 받아들인 내 뇌가 지멋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적은 것임을 밝혀 둠)

그 대사를 들으면서, 난 레즈비언인 그녀가 그녀의 딸과 함께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이 또한 '바로 그 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영화 또한 그걸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사랑했지만 버린 남자, 이젠 에이즈에 걸려 죽어 가는 남자를 위해 부산스럽게 만찬을 준비하던 오후,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까봐 허겁지겁 들어 선 딸. 그 딸 앞에서 훌쩍이다 만찬 준비는 제쳐놓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린 엄마와 딸. 그리고 그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이 행복인 거라고 영화가 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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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의 단편 소설집 <Nocturnes> 의 'Crooner (노가수)' 는 한때 유명했던 가수가 황혼기에 접어 들면서 자신의 아내를 위해 곤돌라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내용이다. 부인을 위해 마련한 그 깜짝 이벤트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보내주기 위해서다. 부인이 꿈꾸었던 삶이 허황되건 철없건 간에, 그녀가 꿈꾸었던 삶이기에 그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이벤트를 돕는 기타 연주자 '나'가 그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In other words, my friend, I could make a comeback. Plenty have from my position and worse. But a comeback's no easy game. You have to be prepared to make a lot of changes, some of them hard ones. You change the way you are. You even change some things you love."


그의 말처럼, 'comeback' 은 'no easy game' 인거다. 지금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내가 있었던 그 자리로 가는 건, 누워서 떡먹기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그는 그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결행한다. 그녀를 보내 주는 것. 그녀와 갈라 서는 것.

이렇게 카츠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통해 다시 <The Hours> 의 리차드가 연결된다. 리차드는 달로웨이 부인인 메릴 스트립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몇년을 살꺼야. 이렇게 (내 방에) 쓰레기를 치우고, 죽어가는 나를 돌보면서..."
(이 또한 내 맘대로 영어 대사 번역 이해임을 밝혀 둔다)

그리곤 그는 자신의 시인상 수상을 축하하는 만찬에 데려가기 위해 다시 들린 달로웨이 부인 앞에서 '네 스스로 못하니,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해주지'라는 듯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린다. 이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Mrs. Dalloway> 에서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이웃의 남자가 창문밖으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The Hours> 속의 버지니아 울프와 리차드의 엄마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고 돌아 갔지만, 달로웨이 부인과 'Crooner' 의 부인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한 남자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순간에 살고 순간에 또한 갇혀 있다. 그 순간은 행복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현실이 그 순간, 그러니까 행복과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다시 많은 순간, 스스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우리가 있던 자리, 우리가 가야 할 자리로 돌아 가는 것은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깨고 고통과 암흑으로 향해가는 거라는 통념과 관습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채로.

어쩌면 '순간이 영원'이라는 말은 그저 한낱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 사실을 보여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가 지나간 삶의 한 장면을 영원히 (어쩌면 영원히) 되새기기 때문이다. 이룰 수 없었던 꿈을 평생 간직하고 살듯이 말이다.

<The Way We Were> Barbra Streisand

2009/12/01 16:23 2009/12/01 16:23
Posted by 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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