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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살기 위해 하는 거지만 대체로 좌절된다. 짧게든 길게든.
그리고 혁명이란 말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 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중에서)

혁명은 성공하면 추구하는 삶의 욕망에 한 걸음 다가가지만 실패하면 때때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혁명의 완수 또는 좌절, 아님 사느냐 죽느냐 바로 그것인 셈이다.

영화 레볼루션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적 논쟁이 있다 (http://latimesblogs.latimes.com/files/2009/01/debate-the-last.html). 에프럴 (April) 의 죽음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던 그녀가 예견한 필연적 결과 였을까 아니면 그녀도 예견하지 못했던 그저 완성되지 못한 욕망의 부산물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그녀는 죽을 걸 알고 혼자 집에서 임신 중절을 감행한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을까.

둘 다 맞고도 둘 다 맞지 않을 수 있다. 비겁한 대답 같지만 지금의 내 생각으론, 적어도 나에겐, 이건 최선의 분명한 답이다. 그녀가 죽음을 앞두었던 그 날 아침, 카메라에 비치는 에프럴은 마치 중대한 결심을 마친 사람처럼 침착하고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 완벽한 아침을 준비하는 여자처럼,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처럼 에프럴은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불안함을 안겨준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결심을 한 걸까. 에프럴의 '완벽한' 아침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그저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남편 프랭크 (Frank)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그녀의 '보통과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다. 이런 뜻에서 에프럴은 자신의 죽음을, 물론, 자신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한 생명을 없애 버리는 그 무시 무시한 일을, 감수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에프럴에겐 자신이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두 사람의 목숨과 같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간절히 차라리 죽고자 했을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한다면, 그건 애초부터 살기 위한 선택이지 죽고자 하는 선택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정말 간절히 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프럴은 끝까지 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절을 끝내고 맨발로 계단을 내려와 가는 곳은 그녀가 남편의 현실적 결정과 자신에 대한 설득을 피해 도망치듯 내달았던 집 앞의 숲이 보이는 커다란 창가다. 카메라는 그 창을 너머 다시 그 숲속 어딘가 또는 그 숲 너머 어딘가를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있는 에프럴이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추구했던 욕망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다시 그녀의 치마 밑으로 선홍색의 핏물이 스며 내리기 시작했을때 그녀는 당황했다. 살고 싶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찌 딱 한가지 마음이었을까. 에프럴은 분명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지독히 살고 싶은 마음. 자신이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첫 째도 실수로 생겼잖아...."
"어떻게 실수로 아이를 낳고 키웠다고 말할 수 있어..."
"아니, 내가 그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라.... 나 애들 사랑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비록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장면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였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고, 좀 더 살아 있는 듯이 살게 될꺼라고 부푼 희망에 빠져있을 때 그 엄마, 부인, 한 여자, 에프럴을 좌절 시키는 건 세 째 아이의 임신이다.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삶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지 아이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와 삶의 욕망이 항상 죽기와 살기처럼 서로 다른 끝에 있어서 결코 둘 다 가질 수 없는 기로에 선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뜻에서 임신 중절은 이 영화에서 욕망의 추구를 가로막는 중대한 비유가 된다.

에프럴과 프랭크를 통해 보는, 1950년대 미국 도시 외곽에 위치한 '혁명의 거리'에서 사는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부부의 삶은 한치의 덜함도 더함도 없이 그저 2009년 우리의 삶이다. 가족의 현재, 가족의 미래, 아이들의 교육, 아이들의 장래,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범벅이 되어 돌아가는 일상. 그 속에서 '내 욕망'을 말할 때 우리는 얼마나 뜨악한 눈빛들을 감당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재미 있는 건, 바로 그런 시대와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통분모들이다. 그래서 때때로 줄거리와 영상이 그동안 심심치 않게 봐온 일상과 욕망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장면과 흐름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열정적이고 뜨거운 영혼을 가진 에프럴을 연기하는 케이트 윈슬릿의 몸과 열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가열차게 싸우는 장면들은, 그런 지루함을 충분히 떨쳐 버릴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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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사진이라 좀 그렇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트 윈슬릿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다. 뭔가에 열중 해 있는 여자. 살의 욕망에 한층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여자 같아서일까.


배우로서보다 그저 한 여자로서 참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케이트 윈슬릿. 평소의 모습은 소탈하고 털털해 보여 좋고, 연기를 할 때 그녀는 늘 얼굴이 달아 올라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이타닉> 때도, <Little Children> 에서도, 이번 영화에서도 범상치 않은 여자, 내면의 욕망을 분출하고자 하는 여자, 그래서 '죽거나 살거나'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이전에도 이 후에도 최선을 다해 사는 여자, 그런 연기를 한 케이트 윈슬릿이 무척 반가웠던 건 물론이다.
2009/01/27 14:47 2009/01/27 14:47
Posted by 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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