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글 쓰는 것이 '전달하는' 것이라면,
문학적 대상물 '언어를 넘어선' 전달,
즉 말들에 의해 생산되었다가
말들에 의해 재차 막힌
무의미 작용의 '침묵'에 의한
전달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문학적인 이야기다'라는 것은
'당신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한다
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 문학적 대상물이 독자에게 전달해야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침묵의 비(非)지식이 어떠한 것인가 알아보자.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문학 작품이 지닌 '의미작용의 내용'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 침묵에로
거슬로 올라가는 일일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제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 중에서-
그냥 뜻없이 편 곳,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인 듯 싶지만, 한글번역 첫 문장엔 주어가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단번에 알 수가 없을 만큼 번역이 명료하지 않다. 원문 때문 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답답한 번역이란 생각을 안할 수 없다.
그래도, 어쨌든,... 문학은, 무언가를 '언어를 넘어서 하는' 전달이란 말에 눈이 머문다. 간혹 우리가 말하는, 행간을 읽으라는 것과 같은.

이런 것, 이창래의 <Aloft> 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거다. 그의 진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과 그려지는 행동 사이에 있다고 생각 했다. 즉, 글자가 없는 그곳. 그리고 내가 찡하고 공감하는 것은 바로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새겨 놓은 그의 감정과 생각이다.
인문학 책은, 가끔 시집같다. 내 맘대로 읽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내 맘대로 느낄 수 있는. 번역서일때는 재해석 과정(?)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이 가진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옆에 두어 본다. 마치 오늘과 내일을 점치는 패들마냥.
...
사실, 이건 언니의 책이었고, 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한 기억이 없다. 지금까지. 그런데 오랜 세월 그래 왔듯이, 이걸 지금 여기, 미시건 한 시골 구석탱이에 박혀서도 가끔 들추고 있는 거다. 근데, 책을 들추다가 마지막 책갈피에서 뭔가 떨어졌다. 쪽지 한 장. 이게 왜 여기있지... 이 쪽지에 대한 아무런 실마리가 없다. 그저, 아직도 종종 기억하곤 하는 후배의 이름이 써있는 것 외에.
언니, 책 잘 봤어요.
책 고마웠고 언니도 실기시험 열심히 봐요.
차돌멩이 언니에게
은경이가.
내가 기억하는 그 은경이가 맞겠지...하는 생각, 그리고 그땐 그애에게 내가 차돌멩이 같았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 그리고는 그 쪽지를 다시 있던 자리에 끼워 넣어 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