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걸 좋게 생각한다. 그래서 간혹 그의 블로그에도 들린다.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주장에 다 공감하진 않지만 그가 살아가는 방식과 추구하는 소박한 삶의 자세는 공감가는 바가 많다.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점도 공감하지 않는 지점도 있지만, 우리 사회속에서 그의 존재와 그의 역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여기는 편이다. 사람 자체가 다양한만큼 생각이 다양한 건 자연스러운거다. 다만 다양성을 전제로 할 때, 그만큼 중대하게 여겨야 하는 게 조율이다. 다양성에 따른 각자의 자유만을 인정하면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살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
간혹 김규항이 주장하는 정치적 견해에 전혀 동감이 되지 않아서, 그의 생각에 '조율'이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그의 '뜨거운 맛'이라는 글에 실린 그의 생각 같은 거다. 그는 '진보세력의 결집'이나 ;비판적 지지'라는 주장에 굉장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진보세력이라는 그 불분명한 경계 속에 이 사회의 진보를 갉아먹는 더 본질적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맹박은 그저 하나의 현상인거다). 본질적 모순을 깨지 않는 한, 아무리 현상적 모순을 건드려봐야 별볼일 없을 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음과 같은 말도 그런 생각 속에서 나온다.
난 그의 두가지 생각 모두 맞지 않다고 본다.
우선, 그의 주장, 즉,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맹박정권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된 진보표를 늘리는 거라는 생각 자체가 그의 이론적 상상력에서 비롯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진보후보의 득표율'라는 것 자체가 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보표'는 평생가야 늘지 않는다. 조금 더 많아졌다간 조금 더 적어졌다가 할 뿐, 어느 선 이상으로, 그러니까 획기적인 혁명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진보표'는 그이 상상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사람이란 굉장히 무능해 보이지만 그렇게 무능하지만도 않은 존재인 것처럼, 굉장히 훌륭한 것 같지만 그리 훌륭하지도 않은 존재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물적 본능으로 선택을 하는 종이다 (그러니까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는 동물인거다). 몇몇의 예외적인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예상치 못하는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모른다. 현재 닥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가운데 변화하고 발전하며 그 우연 속에 미래로 다가가는 것일 뿐이다. 김규항과 그의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이점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태도는 대체로 대단히 계몽적이고 우월감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지한 일반사람들을 계몽시키고 선동해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띈 지식인'의 태도를 보인다는 거다.
또 한편으로, 김규항은 '진보후보의 득표율'이 선거의 본질인듯이 말하지만, '진보표'가 정치권력이 될 수 있는 선에 이르러 그 표가 '권력'이 되면, 그 '권력' 또한 분명히 부패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믿음처럼 그 득표율은 '본질'이 될 수가 없다. 즉, '진보표 (정)' 역시 변증법적으로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반동표' (반)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순간 우리는 또다른 '진보표' (합) 를 추구하게 될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본질인듯이 말하는 특정진보정당의 득표율은 결코 정권을 뒤집고 혁명을 이룰만큼 커질 수도 없고 커진다해도 아무 의미없는, 사회 진보 요소의 본질이 아닌 부분일 뿐이라는 거다. 이에 따른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진보표는 '특정한 극진보 후보'의 표로 대변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작위적인 진보성향의 표 속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의 글의 마지막 인용부분을 읽었을때는 화가 나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런 무책임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해서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최악이 이겨버려 다시 시민들이 노동자들이 생업을 전폐하고 촛불들고 짱돌들고 거리로 나가게 되는 일은 비극이다. 절대 희화화 하거나 희망으로 채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정치를 통한 합법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시민의 생활과 생명을 담보로한 희생으로서 (그가 멋진듯이 일컬은 '직접민주주의') 바꾸어온 것은 가슴 저리도록 슬프고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그런 역사가 또 올꺼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제 더이상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로, 촛불을 들고, 짱돌을 들고 삶을 내팽개치고 거리고 나가야 하는 그런 날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믿을 때인거다.
맹박정권이 미친개처럼 날뛰고, 시민들이 촛불들고 거리에 나서고, 경찰들에게 애엄마와 아빠들이 짓밟히고, 죄없는 사람들이 끌려가고, 노무현이 죽어 나가고, 사람들이 넋놓고 우는 것을 이 먼 타국에서 목격하면서 맛본 것은 희망이 아니라 비극이고 절망이었을 뿐이다.
김규항은, 우리의 역사가 늘 비극이어야 한다고 믿는 걸까. 희망 속에서 희망을 일구는 일은 불가능 하다고 그는 믿는 것 같다. 왜 비극 속에서만 희망이 있다고 믿는가. 그는 최악, 밑바닥, 절망의 끝에서야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난 생각이 다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변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온전치 않은 힘이라도 뭉쳐 커다란 희생없이 변화를 일구어 내고, 또 다른 모순을 찾아내고, 또 다시 그 모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신이 아니고, 동물보다 조금 나은 이상한 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큰 희망을 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절망에 빠지지만도 않는 거다.
사람이 이루어 내는 변화의 순간은 감지하거나 예상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양질전화의 그 순간이 항상 공산당 선언이나 소련의 몰락처럼 획기적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김규항은 모르는 걸까. 그리고, 절망의 끝에 다다르면 대부분 그건 그야말로 죽음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사실을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절망에 다다른 자들의 죽음을 다수를 위해 치뤄야 할 소수의 희생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이론적 상상을 위해 그 죽음과 희생을 미화하고 싶은 걸까.
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유모차를 밀고 밤새 거리를 행진해야 하는 사회를 증오한다. 내가 사기꾼 정권을 증오하는 것도 그들이 사람들을 자꾸 거리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선거를 하는 것이고 그 선거 결과를 지켜 보면서 날밤을 새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커다란 희생없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치와 법을 제대로 세우려고 노력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이 무엇을 들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그건 가슴아픈 '희생의 제사'일 수밖에 없다. 거리의 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찬미할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서서 희생의 제를 치루기 전에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과 수행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김규항과 생각이 다르다.
간혹 김규항이 주장하는 정치적 견해에 전혀 동감이 되지 않아서, 그의 생각에 '조율'이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그의 '뜨거운 맛'이라는 글에 실린 그의 생각 같은 거다. 그는 '진보세력의 결집'이나 ;비판적 지지'라는 주장에 굉장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진보세력이라는 그 불분명한 경계 속에 이 사회의 진보를 갉아먹는 더 본질적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맹박은 그저 하나의 현상인거다). 본질적 모순을 깨지 않는 한, 아무리 현상적 모순을 건드려봐야 별볼일 없을 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음과 같은 말도 그런 생각 속에서 나온다.
서민대중의 삶에서 노회찬과 심상정의 득표율은 최악인가 차악인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진보후보의 득표율은 그 자체로 진보정치의 세와 힘으로 작동하며 그게 얼마나 느는가에 한국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선과 무관한 표는 ‘사표’라거나 비판적 지지를 반대하는 건 근본주의적 태도라는 주장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은 사기다.
그래서 최악이 이겨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그거야말로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문제다. 중앙정치든 지방정치든 그 안에서 도무지 해결이 안 되면 언제든 촛불을 들고 짱돌을 들고 나가면 된다. 나가서 직접민주주의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면 된다. 앞서 말했듯 한국의 진짜 정치는 오히려 제도정치권 밖에서 존재했으며 290:6의 정치구조를 가진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의 패악질을 잠시나마 멈추게 한 건 한명숙도 유시민도 아닌 촛불을 든 시민들이었다. (한겨레)- 김규항, 뜨거운 맛 중에서 -
난 그의 두가지 생각 모두 맞지 않다고 본다.
우선, 그의 주장, 즉,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맹박정권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된 진보표를 늘리는 거라는 생각 자체가 그의 이론적 상상력에서 비롯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진보후보의 득표율'라는 것 자체가 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보표'는 평생가야 늘지 않는다. 조금 더 많아졌다간 조금 더 적어졌다가 할 뿐, 어느 선 이상으로, 그러니까 획기적인 혁명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진보표'는 그이 상상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사람이란 굉장히 무능해 보이지만 그렇게 무능하지만도 않은 존재인 것처럼, 굉장히 훌륭한 것 같지만 그리 훌륭하지도 않은 존재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물적 본능으로 선택을 하는 종이다 (그러니까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는 동물인거다). 몇몇의 예외적인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예상치 못하는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모른다. 현재 닥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가운데 변화하고 발전하며 그 우연 속에 미래로 다가가는 것일 뿐이다. 김규항과 그의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이점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태도는 대체로 대단히 계몽적이고 우월감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지한 일반사람들을 계몽시키고 선동해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띈 지식인'의 태도를 보인다는 거다.
또 한편으로, 김규항은 '진보후보의 득표율'이 선거의 본질인듯이 말하지만, '진보표'가 정치권력이 될 수 있는 선에 이르러 그 표가 '권력'이 되면, 그 '권력' 또한 분명히 부패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믿음처럼 그 득표율은 '본질'이 될 수가 없다. 즉, '진보표 (정)' 역시 변증법적으로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반동표' (반)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순간 우리는 또다른 '진보표' (합) 를 추구하게 될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본질인듯이 말하는 특정진보정당의 득표율은 결코 정권을 뒤집고 혁명을 이룰만큼 커질 수도 없고 커진다해도 아무 의미없는, 사회 진보 요소의 본질이 아닌 부분일 뿐이라는 거다. 이에 따른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진보표는 '특정한 극진보 후보'의 표로 대변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작위적인 진보성향의 표 속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의 글의 마지막 인용부분을 읽었을때는 화가 나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런 무책임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해서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최악이 이겨버려 다시 시민들이 노동자들이 생업을 전폐하고 촛불들고 짱돌들고 거리로 나가게 되는 일은 비극이다. 절대 희화화 하거나 희망으로 채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정치를 통한 합법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시민의 생활과 생명을 담보로한 희생으로서 (그가 멋진듯이 일컬은 '직접민주주의') 바꾸어온 것은 가슴 저리도록 슬프고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그런 역사가 또 올꺼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제 더이상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로, 촛불을 들고, 짱돌을 들고 삶을 내팽개치고 거리고 나가야 하는 그런 날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믿을 때인거다.
맹박정권이 미친개처럼 날뛰고, 시민들이 촛불들고 거리에 나서고, 경찰들에게 애엄마와 아빠들이 짓밟히고, 죄없는 사람들이 끌려가고, 노무현이 죽어 나가고, 사람들이 넋놓고 우는 것을 이 먼 타국에서 목격하면서 맛본 것은 희망이 아니라 비극이고 절망이었을 뿐이다.
김규항은, 우리의 역사가 늘 비극이어야 한다고 믿는 걸까. 희망 속에서 희망을 일구는 일은 불가능 하다고 그는 믿는 것 같다. 왜 비극 속에서만 희망이 있다고 믿는가. 그는 최악, 밑바닥, 절망의 끝에서야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난 생각이 다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변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온전치 않은 힘이라도 뭉쳐 커다란 희생없이 변화를 일구어 내고, 또 다른 모순을 찾아내고, 또 다시 그 모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신이 아니고, 동물보다 조금 나은 이상한 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큰 희망을 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절망에 빠지지만도 않는 거다.
사람이 이루어 내는 변화의 순간은 감지하거나 예상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양질전화의 그 순간이 항상 공산당 선언이나 소련의 몰락처럼 획기적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김규항은 모르는 걸까. 그리고, 절망의 끝에 다다르면 대부분 그건 그야말로 죽음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사실을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절망에 다다른 자들의 죽음을 다수를 위해 치뤄야 할 소수의 희생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이론적 상상을 위해 그 죽음과 희생을 미화하고 싶은 걸까.
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유모차를 밀고 밤새 거리를 행진해야 하는 사회를 증오한다. 내가 사기꾼 정권을 증오하는 것도 그들이 사람들을 자꾸 거리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선거를 하는 것이고 그 선거 결과를 지켜 보면서 날밤을 새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커다란 희생없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치와 법을 제대로 세우려고 노력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이 무엇을 들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그건 가슴아픈 '희생의 제사'일 수밖에 없다. 거리의 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찬미할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서서 희생의 제를 치루기 전에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과 수행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김규항과 생각이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