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고르게 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나의 경우, 한국에선 물론 기사나 서평을 읽고 선택하거나 직접 서점에서 이 책 저 책들을 들추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선택한다. 미국에 와서는, 일단 직접적인 관심분야인 음악과 관계된 책들을 먼저 보게 되고 소설의 경우는 책 앞 뒤에 짤막하게 걸려 있는 소개나, 평들을 읽고 고르는 경우가 많다.
<피아노 선생>의 경우는 일단 제목이 피아노 선생인 신간이어서 흥미를 가졌다가 그 저자가 홍콩 태생인 한국인이라는 정보를 알게 되면서 좀 더 관심을 갖고 읽게 되었다. 재미 동포라는 저자의 개인사가 과연 이 소설에서 피아노 선생이라는 제목과 결합하고 있을까. 결합되어 있다면 어떻게 형상화 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피아노 선생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질까. 이 제목으로 어떤 내용을 펼쳐내었을까... 등등이 독서를 시작하며 가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 관심은 책을 읽어 가면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촛점은 영 어긋났다. 일단 이 책에서,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첫번째 이유였던, '피아노 선생'은 특별히 '피아노 선생'이어야 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도대체 왜 책의 제목이 '피아노 선생' 이었는가가 궁금해질 정도. 피아노 선생이 아니라 미술 선생, 또는 춤 선생이었어도 될 것을. 그리고 이 책, <피아노 선생> 만을 놓고 말한다면, 제니스 리라는 이 작가에게 한국계 작가라는 이름을 붙일 타당한 이 또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만으로 '한국 작가'로 한다는 논리를 세운다면, 요즘 같은 혼종시대엔 그런 건 분명히 논외가 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한 제니스 리가 재미 한국 작가냐 아니냐는 독자적으로 다뤄질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소설 안에서 평가 되어야 할 논의이고 문제다. 그녀 소설의 진위와 무게보다 그런 소개 문구가 상품 시장에서 부각되는 그 점이 못마땅할 뿐이다.


책의 내용 얘기를 하자면, 이 소설의 중심은 피아노 선생 클레이어 (Claire) 가 아닌 트루디 (Trudy) 와 윌 (Will) 에게 있다. 그렇다 피아노 선생은 미국인 클레이어지만, 그녀는 그저 부수적인 인물일 뿐이다. 난 사실, 이 피아노 선생이란 인물이 그다지 중심인물들의 사건 전개와 관계가 없다고 느낀다. 아니, 이 인물이 이 소설에서 왜 필요한지조차 다가오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의 주연, 트루디는 매력적이고, 영민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여인이다. 소설은 트루디를 남부럽지 않게 가졌으되 영혼은 불운한 여인으로 그리며 그녀의 허랑방탕해 보이는 삶을 합리화 하지만, 이 소설의 트루디를 따라가는 나는 그녀가 믿는 그녀의 태생적 불운도 비극적 죽음도 참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라면서 끝끝내 공감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홍콩 부호인 아버지의 후원 속에서 놀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트루디의 삶은 공허하고 냉소적이다. 그녀의 텅빈 삶에 대한 변명은 아름다운 포르투갈계 여자였던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것. 그녀의 곁에 그저 '머물렀던' 영국인 - 윌은 적극적이지 않으나 비겁하지도 않고 단호한 선택을 하지는 않으나 선택을 하지 않을 줄도 아는, 마치 영화 속에서 많이 봐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영국인 상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
전쟁 통에 팔이 잘려 나가는 고문을 당한 이야기가 나와도 충격적이지 않은 건, '태극기를 휘날리며 (2004)'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전쟁에 관련된 소설과 영화에서 그보다 더한 비극과 충격들에 공감한 적이 있기 때문일테며, 비극적 사랑이라면, '카사블랑카 (1942)'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와 소설을 봐온 터인데, 어떻게 뒤늦게 트루디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만 그저 그렇게 만난 클레이어에게도 사랑도 아니고 정사도 아닌 관계를 뜨뜻미지근 유지하는 윌이 만들어 내는 사랑에서 비극과 연민과 공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홍콩 여자와 영국 남자의 전쟁통 사랑이라고 한다고 해도, 트루디 리앙은 '홍콩'의 여자가 아닌 껍데기만 홍콩 여자이되 정신과 삶은 '서양' - 서양 최고의 브랜드를 걸치고 홍콩과 서양의 최고의 요리를 먹고 마시는, 영어와 광둥어 (Cantonese) 에 모두 유창한 - 인인 무소속의 여자일 뿐이다 (하긴, 우리 시대에 소속이 제대로된 여자가 있기나 하겠냐만, 그래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50년대 아닌가). 홍콩은 그저 영국인들이나 미국인들 눈으로 보는 홍콩일 뿐이고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왕과 나 The King and I (1951)'의 이미 서양화가 되었거나 또는 서양화를 추구하는 귀족집단일 뿐이다. 그 역시 작가의 '서양인의 눈'으로 본.



소설은 이렇듯, 역사와 공간을 넘어 초월적 공감이나 감동을 일으키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역사와 공간 안에서도 필연적 연관고리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 내지 못한다. 적어도 내가 읽은 <피아노 선생> 은 그랬다. 미국에선 '하버드를 나온 이민 2세 작가'가 쓴 '홍콩여자와 영국 남자 -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 의 전쟁 속 사랑' 이라는 요소들로 주목을 받고 작가의 말처럼 운좋게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는 행운을 거머쥔 것만 같고, 한국에선 '한국인 2세로 미국과 해외 문단에서 주목 받은'이란 소개로 팔릴 것 같다는 찝찝한 생각 외에는 내가 애초에 기대한 흥미도 관심도 의문에 대한 답도 아무 것도 채워 주지 못한 게 제니스 리의 <피아노 선생>이다.
이 책을 읽은지 이미 몇 달이 되어 가고 이후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제니스 리의 스승이기도 하였다는 이창래의 소설, <Aloft> 다. 이창래는 <A Gesture Life> 와 <Native Speaker> 로 더 유명한 것 같지만, 반값 중고 책방에서 꼼지가 이 책을 사와서 책꽃이에 꽂힌지 일년이 넘었다는 이유로 일단 집어 들었다. 재미 동포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그에게서 꼭 디아스포라의 어떤 면을 발견하기를, 또는 한국인으로서 가진 감수성의 어떤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소설을 읽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 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 가는 삶의 필연성과 질곡을, 그 속에서 발견해 가는 인간의 사유와 감성을 공감하려는 것이다. 이창래의 소설의 제 2장을 끝내가는 지금은 시작부터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흥미롭고 재미가 있어 읽기에 즐겁다. 이런 즐거움이 제니스 리의 소설에선 별로 없었다. 소설 속 인물들과 진행에 기운 빠지고, 어떤 땐 짜증이 났다. 머리로 부터 온 반응이 아니라 몸으로 부터 온 반응이었다는 거다.

써놓고 보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루에 아주 조금씩 소설을 써나간다는 작가와, 또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는 참 죄송한 서평이 되었다.


2009/08/06 18:30 2009/08/06 18:30
Posted by 꼼미

BLOG main image
by 꼼미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일상
영화 드라마
논제
책읽기
음악
공연
취미
하루
자료
정치 사회
번역
먹는 일
여행, 구경
영화
번역
음악교육
고양이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2012/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58216
Today : 24 Yesterday : 64